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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빗나간 열심(원수를 사랑하심)
 글쓴이 : 에베소
 

9:1 사울이 주의 제자들을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9:2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좇는 사람을 만나면 무론 남녀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 오려 함이라

9:3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9:4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9:5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9:6 네가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9:7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섰더라

9:8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9:9 사흘 동안을 보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하니라

 

신앙인들이 잘 알고 있는 바울의 회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신자나 불신자나 이 내용들을 많이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조차도 신약의 반 이상을 기록했던 사도바울의 이야기에 대해서 알고 있고, 그가 처음에는 예수를 핍박하던 자였으나 회심하고 돌아서서 예수를 전파했던 이야기에 대해서 많이들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바울에게 나타난 주님이 나에게도 나타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적지 않은 사람들이 하는 것 같고, 저도 어렸을 때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습니다. 바울에게 나타나셨던 주님이 나에게 나타나신다면 쉽게 믿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본문에서 보고자 하는 것은 사울에 경험했던 깊은 영적 체험에 대해서 우리도 같이 그 길을 따라가면서 성경을 통해서 그가 체엄했던 경험했던 세계에 대해서 공감하고 갈수 있는 시간으로 본문의 말씀을 보고자 합니다. 본문의 말씀은

 

9:1 사울이 주의 제자들을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문에 앞서 사울이 어떤 사람이었나 볼 필요가 있습니다.

 

7:57 저희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7:58 성 밖에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7:59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7: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사울은 어떤 사람이었냐면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이는데 있어서 그 핏 값을 받아야 될 자가 있다면, 내가 받겠노라 했던 사람입니다. 그의 죄가 확실하니 죽어 마땅하다 라고 여겼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8장에 보면 사울이 그의 죽음을 마땅히 여기더라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의 죽음을 마땅히 여겼다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누구에게도 악을 행한 것이 없습니다. 그가 전한 예수에 관한 말을 듣고 그것으로 인해서 죽어 마땅하다고 여겼던 것이 사울의 모습이었습니다.

 

8:1 사울이 그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나서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8:2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

8:3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있는 교회를 없애버리려고 했습니다. 주님의 부활하고 승천하심으로 오순절 성령이 임하므로 주가 그리스도 되심이 만방에 선포되고 많은 믿는 자들이 생겨서 예수를 믿고 따랐는데 세워진 교회를 다 없애버리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집집마다 찾아가서 예수 믿는 자를 끌어다가 옥에 가뒀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니 믿는자들이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사도외에는 다 흩어졌습니다. 다 잡아다가 어떤 이는 죽이고 어떤 이는 옥에 가뒀으니, 믿는자들이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는 지킨 것입니다. 모든 이들이 흩어져서 어떠했나? 놀라운 것은 이런 핍박을 통해서도 하나님께서는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흩어진 자들이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같이 모여서 주님의 은혜를 받고, 능력과 이적과 표적을 보면서 확실한 믿음 안에서 견고하게 세워져가는 신앙인들이 흩어져서 그들이 믿었던 경험하고 체험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에 대해서 증언하기 시작했습니다. 침묵하지 않았습니다.

 

8:4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

 

여기저기서 복음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러니 사울이 예루살렘에서 집집마다 찾아다니면서 믿는 자들을 다 없애려고 했던 사울이 이들이 흩어지니 없어진 것이 아니라 다시 복음을 전하고 있으니 더 화가난 것입니다. 안되겠다 땅 끝까지라도 쫓아가서 그들을 잡아야겠다는 열정이 불탔던 것 같습니다.

 

9:1 사울이 주의 제자들을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사울은 교회에, 믿는 자들에게 큰 위협이 됐습니다. 그 위협과 살기가 등등했다는 것입니다.

 

9:2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좇는 사람을 만나면 무론 남녀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 오려 함이라

 

다메섹이 큰 도성인데 거기서도 믿는 자들이 예수를 전한다는 얘기를 들었던 것 같습니다. 거기 가서도 잡아와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공문을 청한것입니다. 예루살렘과 다메섹의 거리는 약100km라고 합니다. 여기서는 어떻게 될까 생각해보다가 대구역까지 가면 100km가 될까 생각되어서 검색해봤습니다. 여기서 대구역까지 84km가 나왔습니다. 거기서 14km 더 가야되는 것입니다. 그 시대에 자동차 타고 사울이 갔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걸어간 것입니다. 걸어서 100km가 되는 거리를 걸어갔습니다. 언제? 정오쯤 되었다고 행22:6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22:6 가는데 다메섹에 가까왔을 때에 오정쯤 되어 홀연히 하늘로서 큰 빛이 나를 둘러 비취매

장렬한 태양빛에도 예수 믿는 자들을 잡을 생각으로 멈추지도 않고 간 것입니다.

여러분 열흘전만 해도 정말 더웠습니다. 2주전 너무 더워서 태양이 장렬하는 태양에 돌아다니는 사람이 몇 없을 정도였습니다. 팔레스타인 지역은 한국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제가 인도에 있었던 적이 있는데, 인도와 좀 다르겠지만 응달과 그늘의 차이는 에어컨 틀어놓은 실내와 밖의 차이같이 큽니다. 한국에서는 감이 오지 않습니다. 요나가 그렇습니다 그늘에 있을 때 박넝쿨을 갉아먹어서 떨어졌을 때 막 하나님께 불평했던 모습이 있는데, 그게 실감날 정도로 그늘과 태양아래 있는 것은 다릅니다. 이런 태양을 마다하지 않고 가는 것입니다. 사울의 이 예수 믿는 자들에 대한 적개심이라고 할까 분노를 작렬하는 태양도 막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뚫고 가는 것입니다. 그런 사울에게 음성이 들립니다.

 

9:3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9:4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사울아 사울아라고 하셨습니다.

 

9:5 내가 대답하되 주여 뉘시니이까 하니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라 하시더라

 

사울은 이 음성을 듣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저는 예전 수련회 갔을 때, 이 음성이 나에게 들리는 음성과 같았던 적이 있습니다. 국어 시험문제에 낼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음성의 목소리는 어떤 뉘앙스였을까? 사울이 들었던 이 음성은 어떤 것이었겠습니까? 이런 음성이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23:37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제가 가지고 있는 개역한글 성경에 보면, 37절부터 39절까지 소타이틀로 예루살렘을 두고 한탄하시다라고 되어있습니다. 두 번 부르십니다. 사울아 사울아.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너무 안타까운 주님의 음성입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면서 예루살렘은 입성하지만 그 입성 전에 한탄하시고 우시는 장면이 누가복음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입성전에 예루살렘에서 우시는, 주님의 우시는 눈물을 흘리시는 장면이 복음서에 많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비유하자면 이사야서 1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1:2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1:3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1:4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슬프다는 것입니다 탄식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통곡하십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슬퍼하실 일이 있습니까? 못하실 일이 뭐가 있습니까? 능력 있는 하나님께서 고통당하시겠습니까? 눈물 흘리시겠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무감정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슬프다고 하십니다. 무엇 때문에 슬퍼하시고 통곡하시나? 하나님의 백성, 그 부른 자들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하실 수 있습니다. 단 하나 못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안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자유를 빼앗지 않으십니다. 자식 이기는 부모가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고집피우면 할 수 없다고, 하나님께서 다 하실 수 있지만 하나님의 백성들 인간의 마음을 강제로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강제로 주님을 따르게 하나님을 믿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지금이라도 할 수 있죠. 그러나 하지 않았습니다. 창조의 뜻에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유를 줬다면 이유가 있고 목적이 있는 것인데 다시 빼앗겠습니까?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많은 이적과 표적과 기사를 많이 행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님을 알지 못하고 거역하고 배반합니다. 너희는 찌르고 아프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가가서 여전히 사랑하시는 그 사랑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너희가 싫어하였도다 라고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다. 사울을 향한 주님의 음성은 마치 이와 같은 것이 아닐까? 라고 생각해봅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사실 사울은 예수를 핍박한 적이 없습니다. 예수 믿는자를 핍박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어떤 것인가? 주님께서는 따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신과 동일시합니다. 일체 사랑 안에서 일체가 된 주님은 우리를 일체로 여기시고 생각하십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생각하시는, 우리를 대하시는 주님의 모습은 하나로 여기시는 것입니다.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했을 때 주여 뉘시오니이까. 이 말을 듣기 전까지는 충격을 안받았을 것입니다.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사랑했음에도 불구하고 거역하고 싫어하고 멀리하고 배반하고, 그것으로 말미암은 고통. 그것을 거역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 그것이 주님의 마음이었고 동일하게 느꼈습니다. 사울을 통해서 동일하게 경험되는 세계입니다. 사울은 이 얘기를 듣고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사울은 왜 예수 믿는 자들을 잡아들였습니까? 왜 예수 믿는 자들을 옥에 잡아넣고, 다메섹까지 가서. 생각해보십시오. 쉬운 일이 아닙니다. 대제사장이 사울에게 명령한적이 없습니다. 사울이 직접 대제사장을 찾아가서 내가 이것을 할터이니 공문을 주시오. 자기스스로 한것입니다. 누구를 위해서 그런 일을 한 것입니까? 자기 유익이 있습니까? 그렇게 하면 누가 상을 주겠다는 것입니까? 돈을 주겠다는 것입니까? 주님께서 이야기 하셨습니다. 너희를 공회에 권세자들에게 끌고 가리니 그것이 하나님을 공경하는 예라 하리라라고 주님께서 고별설교에서 말씀하십니다. 똑같은 것입니다. 사울은 주의 제자들을 옥에 잡아다 넣고 때로는 결박하고 가두는 것이, 하나님을 위한 길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런 일이 왜 생긴 것입니까? 주님에 대한 오해가 있는 것입니다. 주님에 대한 오해가 사울 안에 있어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말씀을 훼방하는 훼방자로 여겼고, 그를 믿고 따르는 자들을 동일하게 취급했습니다. 우리가 신앙의 길을 갈 때 주님에 대한 원망과 한탄과 미움이 들 수 있는데, 다 오해입니다. 오해로 말미암아 생기는 것들입니다. 절망하고 좌절하고 절망적인 세상가운데서 원망하고 비통에 처해서 슬퍼하는 그런 모습이라는 것은 때로는 주님에 대한 오해로 말미암아 생기는 것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울만큼 핍박에 열심이었던 자가 없습니다. 장렬하는 태양도 막지 못하는 열심이 있었습니다. 태양보다 더 뜨거운 열정이 사울 안에 있었는데, 그 열심이 무엇인가? 빗나갔다는 것입니다. 주님 뜻에 맞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울은 너무 충격을 받았습니다. 어떤 충격을 받았나? 사울의 율법의 기준에 따르자면 자기는 주님을 거역하고, 주님을 배반했던 자가 되는 것입니다. 주가 예수라 하니, 내가 핍박하고 결박하고 잡아죽였던 나를 생각해 볼 때 예수가 주님이시라면 나는 죽어 마땅한 그를 거역하고 믿는 자를 잡아죽인 사울은 율법에 기준에 근거하면 죽어 마땅한 자인데 그런 나에게 오셔서 하시는 말씀은 어떤 비난과 책망과 심판이 아닙니다. 그런 말씀이 없습니다. 내가 너에게 할 일을 이르겠다는 것입니다. 내가 너를 쓰겠다는 것입니다.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충격인 것입니다. 나로 인해서 고통 받았을 아파하셨을 주님을 생각해볼 때, 죽어 마땅한 원수였습니다. 예수님의 입장에서 볼 때 죽어마땅한 자이고 원수의 자리에 있었는데 원수를 찾아오신 주님. 원수를 찾아오셔서 그에게 직분을 맡기시는 주님. 이것은 충격인 것입니다. 원수를 찾아와서 심판과 멸망을 주는 것이 아니라 직분을 주시고 할 일을 주셨습니다. 사울은 이 한가지 영적체험을 통해서 그의 삶이 송두리째 바뀌었습니다. 그 어떤 시험과 역경과 어려움도 바울을 막지 못했습니다. 열정 하나 만큼은 꺾이지 않았습니다. 마치 힘이 넘쳤습니다. 힘이 넘쳤는데 배로 비유하자면 동력이 큽니다. 힘이 셉니다. 그런데 사울이란 사람은 방향을 잘 못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잡아서 방향을 트신 것입니다. 그 힘을 가지고 저쪽으로 가라고. 예수쟁이에 대한 칼을 마음에 품고 왔던 사울을 성령의 검을 줘서 저들에게 가라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거꾸로 가라. 저들에게 세상에 가서 복음을 전하게 했던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것입니다. 예수를 얼마나 아프게 했는가? 예수를 얼마나 괴롭게 했는가? 라는 것을 사울은 생각해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스데반이 죽어 마땅하다고 했던 자신의 모습을 돌아볼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핍박했던 자신의 모습을 돌아볼 때, 나는 죄인 중에 괴수다. 디모데전서에 그렇게 이야기 합니다. 디모데는 자기 아들과 같은 자입니다. 아들에게 자신을 죄인 중에 괴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자식에게 부끄러운 것을 이야기 하기 쉽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만큼 그에게 주신 은혜가 크기 때문에 말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딤전1:12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1:13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긍휼을 입었습니다. 자비를 얻은것입니다.

 

1:14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1: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주께서 죄인을 구원하려고 오셨습니다. 죄인중에 괴수라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스스로 예수를 핍박한 적이 없고 예수믿는 자들을 괴롭힌적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울과 같은 죄가 없다고 할지 모릅니다. 과연 그러합니까?

 

주님께서 사울을 긍휼히 여긴 까닭은 무엇입니까?

 

1:16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나중에 주님을 믿고 영생을 얻는자들. 우리를 위해서 그가 본이 되게 하려고 은혜를 베푸셨다는 것입니다. 사울은 주님께서 오래 참으신 것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죄인을 향해 오래 참으심 그것이 지극한 사랑이라는 것을 바울은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큰 세계인가. 고린도전서 13장에 사랑은 오래참고. 사랑을 여러 가지로 표현하는데 첫 번째가 오래참음입니다. 여러분 원수같은, 나를 찌르고 상하게 하는 사람을 참는다는 것 정말 쉽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주님을 찌르고 상하게 하고 아프게하고 눈물 흘리게 하는 자를 오래 참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바울도 얼마나 오래 참았던 경험이 있겠습니까? 많은 이들을 대하면서 오래 참은 경험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용서가 진정한 사랑이구나! 자신을 찌르고 아프게 하는 이들 조차도 용서하고 품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구나. 그것이 주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이구나 라는 것을 사울은 절감했습니다.

신앙의 길에서 참습니다. 여러분 누군가 아프게하고 상하게 하고 찌르는 것이 있거든 참으십시오. 이를 갈면서 참는 것이 아니라, 중심으로 용서해야 합니다. 중심으로 용서하지 아니하면 천부께서도 용서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나를 용서하신 것처럼 우리가 용서해야 합니다. 그런 나에게 아픔을 주는 자가 역설적으로 주님의 사랑을 깨닫게 합니다. 깊은 아픔의 세계를 경험해봐야만 주님께서도 이렇게 아프셨겠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합니다. 주님의 사랑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사울보다 나은 자들입니까? 사울은 그래도 긍휼을 입었다는 것입니다. 모르고 행했기 때문에, 모르고 주의 제자들을 핍박했기 때문에 궁휼을 입었다고 했습니다.

 

5: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 원수였다는 것입니다. 죄인이었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살아계신 하나님이 계심에도 불구하고 그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여기지 않고 아버지로 여기지 않고 무시하고 멸시하고 살아왔던 그 이전 날의 나의 모습이라는 것이 비록 예수믿는자를 핍박하지 않았을 지라도 원수와 같은 모습이 아닌가 라는 것을 바울은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을 거역하고 훼방했던 원수와 같은 우리들의 모습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무시하고 멸시했습니다. 누군가가 우리를 무시하잖아요? 멸시하잖아요? 안에서 확 울컥하고 올라옵니다. 하나님은 누구에게 멸시를 당하는 것입니까? 그의 백성. 자녀삼은 자들에게 무시당하고 멸시 당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원수를 사랑하신 주님. 사랑했던 주님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해서 자기 목숨까지 다 대속물로 주시고 화목케 했다는 것입니다.

 

5: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살으셨을 때, 육신가운데 계실 때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셨습니다. 그러신 분이 다시 살아나셔서 우리를 대하는 모습은 우리를 죄 없다 하심으로 우리를 의롭다 하셨고, 얼마나 더 많은 것들로 우리를 더 풍성하게 채워주고자 하시겠느냐? 라는 것입니다. 원수되었던 알지 못하고 거역하며 믿지 못하고 살았던 우리들. 내 뜻과 내 생각과 내 마음대로 살고자 했던 이전 날의 나의 모습. 그 나의 모습을 대신해서 죽으신 주님께서 지금 하늘보좌 우편에 앉으신 분이 얼마나 나를 더 위하시겠느냐? 라는 것입니다. 그분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을 것이 확실하다는 것입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하고 행했던 사울에게 주님은 찾아가신 것입니다. 죄인을 찾아가신 것이죠? 우리가 원래 주님을 찾아가야 되는데, 우리가 원래 주님께 나아가야 되는 것이죠. 복음서에 많은 이야기들이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하고 주님께 나아갔던 죄인들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어찌보면 사울이 주님께 나아가야 되는데, 죄인을 향해서 다가가시는 주님이십니다. 그 죄인을 멀리하지 않으시고 찾아오신 주님의 사랑에 감격했던, 그 사랑에 젖었던 사울의 경험. 이 경험을 한 사울을 어떤 것도 그를 막을 수 없었습니다. 고린도 후서 11장에 보면,

 

고후11:23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11:24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11:25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11:26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11:27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런 모든 것들이 주를 향한 바울의 마음을 조금도 흔들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조금도 흔들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이 때로는 흔들리고 어렵고 요동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에게 찾아오신 주님. 바울이 경험했던 이것이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있는 것입니다. 나에게 찾아오신 것이죠. 내가 주님을 먼저 찾은게 아니고 주님께서 나에게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 은혜의 세계, 그 사랑의 세계에 대해서 열어주신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사울처럼 굳건하게 붙잡고 가기 바랍니다. 사울은 이런 환란만 경험했습니까? 이런 어려움만 경험했습니까? 아닙니다. 주님께서 함께하시는 놀라운 이적의 역사들 수도 없이 경험했습니다. 그렇기에 주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는구나 라는 것을 삶속에서 체험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떠나지 않고, 주님과 함께하고자 하는 모습가운데 나아갈 때 사도행전에 이런 기적들 많은 이적들을 경험하고, 또 우리가 많은 역경과 환란 속에서도 주님의 함께하심을 경험하면서 신앙의 길을 가는 우리의 모습이 되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