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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포도나무와 가지
 글쓴이 : 에베소
 

본문: 15:1~12

제목: 포도나무와 가지

[성경본문]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너희는 내가 일러 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포도나무와 가지라는 제목으로 오늘 말씀 보고자 합니다. 본문의 말씀은 어떤 상황가운데서 나온 것이냐를 먼저 볼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최후의 만찬을 하시고 십자가의 길이 결정된 상황가운데서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꼭 하고자 하신 말씀을 남긴 것입니다. 그 마지막 말씀을 고별설교라고 하는데, 요한복음 14, 15, 16장 고별설교라고 할 수 있고, 요한복음 17장은 마지막 고별기도를 하시고 18장에 십자가의 길을 가시는 장면을 기록해 놓았습니다.

본문은 그 고별설교 중의 하나입니다. 14장에서 주님께서 제자들을 떠나 나는 아버지께로 간다 내가 너희와 함께하지 않고 떠나가지만 보혜사 성령님을 아버지께서 보내리니 너희가 그로 말미암아 평안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다른 장소로 이동을 하시고 제자들에게 본문의 말씀을 이어서 하시는 것입니다.

본문은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인데,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의 관계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을 들어가보면,


15:1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먼저는 주님과 하나님의 관계가 포도나무와 농부의 관계와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15:2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본문의 말씀은 심판의 말씀이기도 한데, 사랑의 주님께서 심판의 말씀을 하십니다. 설교시간에 심판을 전하는 것이 괴로울 때가 있습니다. 이것 좀 빼고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만 애기하고 주님의 사랑만 받았으면 좋겠는데 주님은 심판에 대해서도 이야기하십니다. 그런 것을 보면 심판을 기억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심판에 거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주님 안에 있는 것입니다.

열매 맺지 못하는 가지는 제해 버리신다고 합니다. 열매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갈라디아서 보면 성령의 9가지 열매가 나옵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사랑의 열매를 맺어야 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열매 맺지 않는 과실은 잘라낼 뿐만 아니라 과실을 맺는 가지도 더 많이 맺게 하려하여 가지치기를 한다는 것입니다. 식물을 과실수를 작은 토마토라도 길러보면 가지치기를 반드시 해야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조금이라도 과실이 열리면 과실에게 영양분이 다 가게 하려고 잔가지들을 다 잘라냅니다. 모든 과실수는 다 그러합니다. 지혜로운 농부는 다 가지치기를 하게 됩니다.

이렇듯 열매맺는 이들 가운데도 가지치기가 있다는 것입니다. 가지치기를 당한다는 것은 때로는아픈 것이죠 아픈 것 우리 안에 잘못된 쓸데없는 것으로 영향분이 가지 않게 하기 위해 잘라낸다는 것입니다.


요한 일서2 15절에 보면,

2: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가지가 포도나무로부터 받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뿌리로부터 영향분을 공급받는 것입니다. 그 영향분이란 주님의 은혜와 사랑 그리고 생명수를 공급받는 것입니다. 포도나무로 다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떨 때에 그 사랑이 거하지 못하고, 은혜를 받지 못하는 것입니까? 본문은 세상의 것들을 사랑하면서 세상 것들을 추구하고 살아갈 때 받지 못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농부는 그것을 잘라낸다는 것입니다. 세상 것들을 추구하는것 잘라내고 영향분을 열매로만 향하게 끔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가지를 친다는 것은 우리가 갈망하고 세상 것들을 갈망할 때 못하게 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큰 괴로움이 될 수 있습니다.

 제 아이들이 있는데 게임을 좋아해요. 스마트폰 게임을 몰입할 때는 다른 애기가 안 들리고 딱 끄면 안색이 바뀝니다. 못하게 하니까 근데 나중에 예를 들어 시간을 게임 30분했으면 30분 책을 읽어라 왜 못하게 하나 자기는 하고 싶은데 못하게 하는 모습이 아빠가 싫을 때도 있는데 이것이 나를 위한 것이구나 라는 생각을 큰애는 아는데 작은애들을 못합니다. 작은애들은 떼써서 무조건 달라고 합니다. 큰애는 알아요 너무 빠져서 몰입되서 좋지 않을 것이라 하여 염려한다 것을 큰애는 알기때문에 떼쓰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어른들도 별반 다를 게 없습니다.


히브리서 12 8절에 보면,

12: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징계는 다 받는 거라는 거에요 참아들을 징계한다 왜 징계하나 바른길로 가게 하기 위해서.. 그런데 징계가 참 싫어요 세상 것들 사랑하고 좋아하는데 그것 하지말고 다른 길로 가라고 할 때, 그것이 때로는 싫고 괴로운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징계가 그런 모습으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

12:11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징계가 당시에는 싫고, 괴롭고,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는 것은 우리로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연단한 자에게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게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적인 시각으로 볼 때 우리가 뭔가 잘못되는 것 같고 잘 안 풀리는 것 같고 어떻게 보면 하나님께 버림 받은것 같이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버림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더 큰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한 연단의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또 반대로 생각해 보면, 모든 것이 잘 풀리는데 어떻게 보면 버려진 자의 모습이 될 수 있다.세상적인 것을 추구하며 살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적인 면에서 아무런 문제가 없이 술술 잘 풀린다면, 그것은 반드시 좋은 것만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고 자신을 돌아봐야 합니다.

 

본문에 돌아가 보면 하나님께서 농부가 가지를 치는 것은 많은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함입니다.

3절에 가보면

15:3 너희는 내가 일러 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15: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4절의 말씀 핵심적인 말씀이죠 나의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주님이 살아 계신데

성령이 오시기 전의 이야기 성령이 오시면 우리 안에 거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있을 것이다고 하십니다.

주님 안에 있는 다는 것은 어떤 것이고 주님이 내 안에 있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그것은 사랑의 일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어느 TV 드라마에 이런 애기가 나왔습니다. 연인한테 말을 하는데, ‘내 안에 너있다고 말을 합니다. 얼마나 사랑하는지 자신안에 상대방이 있다고 합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안에 거하리라 주님 안에 우리가 있는 것이죠 우리를 너무 사랑하시기에 우리가 있는 것입니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저는 개인적으로 이 구절에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묵상하게 되는데 열매를 맺어야 된다는 것이 제안에 얼마나 강한지 열매를 맺어야 한다 이게 강한데, 하다 보니까 내 힘과 내 노력으로 열매를 맺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본문에 그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뭐라고 얘기하냐면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지 아니하면 절로개역개정으로 보면 스스로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스스로라는 것은 by itself “자체적으로 자기 능력으로 자기 힘으로 자기 노력으로라는 뜻입니다. 내 노력으로 내힘으로 내 자원으로 열매를 맺을 수 없다고 주님을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주님의 사랑을 받으면 충만해져서 다 할 수 있을 것 같을 때가 있습니다. 열심히 하는데 가만 보면, 내 힘과 노력으로 뭔가를 해 볼려고 하는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니, 시간이 지나면서 어떤 것을 느끼냐면 메말라지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포도나무에서 떨어진 가지가 열매를 맺을 수 없을 뿐 아니라 메말라지는 것입니다. 포도나무에 붙어 있을 때에만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끔보면 나 자신도 내 힘과 노력으로 막 열매를 맺으려고 애쓰고 있는 모습을 발견합니다.

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포도나무를 떠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떠난다는 게 무엇입니까? 영양분을 공급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죠 나무에 유리된 가지는 영양분을 생명을 공급받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열매를 맺을 수 없고 가지는 말라지게 됩니다.  얼마나 내가 노력하고 힘있는 것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포도나무에 붙어있느냐 붙어있지 않느냐 거기 초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15:6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말라진다는 것 유리된다는 것은 곧 메말라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아들이는 통로! 영양분을 받을 수 있는 통로가 있어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영양분이 모여져서 줄기와 가지한테 갑니다 영양분을 받을 수 있는 통로 가 무엇입니까? 믿음은 은혜를 받아드리는 통로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통로가 단절되고 막히는 것입니다. 막히면 영양분을 받을 수 없습니다.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경험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을 통해서 날마다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경험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어떻게 그리할 수 있습니까? 믿음은 주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능력의 주님을 의지함으로 우리가 처한 현실 속에 개입해 들어오시는 은혜를 경험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럴때 메마르지 않을 뿐 아니라 열매를 맺게 된다는 것입니다.

15: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반복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생명의 말씀이 너희 안에 있으면 무엇이든지 원하든데로 구하라라는 것 주님의 말씀이 내 안에 거한다는 것은 주님의 말씀에 따라서 주님의 원함을 따라서 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원하는 데로 다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내 욕심을 따라 구하는 것이 아니라 내 말씀이 계셔서 그 말씀을 구하는 것 주님 뜻대로 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15:8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과실을 많이 맺으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진실로 주님의 제자가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과실을 맺어야 합니다. 우리의 의지가 과실을 맺고자하는 의지가 강할수록 우리는 무엇을 붙들어야 됩니까? 주님을 붙들어야 합니다. 연합하고 하나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열매를 맺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스스로 열매맺을 수 없습니다.

주님을 떠나서는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주님은 그것을 강조하십니다. 그런데 어떻게 주님 안에 거할 수 있는 것입니까?

15: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계명을 지키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계명은 무엇입니까?


그것을 얘기하기 전에 주님은 주님 안에 있는 기쁨의 세계에 대해서 먼저 말씀을 하십니다.

15: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

기쁨을 충만히 받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이 가진 기쁨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십자가의 길을 목전에 두고 주님은 기쁨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도데체 이런 상황가운데서 주님의 기쁨은 무엇인가? 여러분 죽음 앞에서 기쁨을 얘기할 수 있습니까? 인제 죽어요 죽음이 결정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기쁨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기쁠 수 있을까?

그것은 무엇이냐? 주님 안에서 죽음은 죽음이 아니에요 아버지께로 가는 것입니다. 육신의 죽음이라는 것은 끝이 아니고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것 그것이 죽음에 대한 주님의 생각이 이었습니다.(14:1~3)


어떤 청년이 간증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어렸을 때 자기는 엄마와 다니는 것을 정말 싫어했다고 합니다. 왜 그렇냐면 엄마 얼굴에 화상이 있었다. 얼굴이 화상을 입어서 얼굴이 일그러져 흉측하게 보이니까 같이 다니기 싫었고, 혹시 같이 가다가도 멀리서 친구들이 오면 떨어져서 자기 엄마 아닌 것처럼 다녔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엄마가 장에서 짐이 많으니까 아들을 불러서 같이 가지고 해서 같이 가게 됐는데, 친구들을 만났다고 합니다. 친구가 너네 엄마니?라고 물어서 응.. 어쩔수 없이 엄마를 알게 되고 그 친구들 엄마는 너무 곱고 예쁜데 자기 엄마는 흉측하게 생겨서 보이고 싶지 않았는데, 엄마가 괜히 날 불러가지고 괴로워하면서 투덜투덜했다 합니다. 집에 가서 엄마는 얼굴이 왜 그러냐고 다른 친구 엄마는 다 고운데 엄마는 다 화상입어서 일그러져서 그렇냐고 물어봤답니다

엄마가 애야 미안하다 하면서 왜 화상을 입었는지 이야기하는데, 아기 였을때 너를 재우고 일을 보러 밖에 잠시 나갔는데 돌아와보니 집에 불이 나서 동네가 난리가 났었다면서. 아기가 생각나서 뛰쳐들어 갈려고 하니 동네사람들이 죽는다고 말렸는데,  어찌 그럴 수 있습니까 자식이 있는데 뛰쳐들어가서 아기를 보듬고 나오는데 위에서 불덩어리가 떨어져 여기가 다 떨어져서 화상을 입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손과 얼굴과 목까지 다 화상을 입었다. 너를 안고 나와서 비록 화상을 입었지만 내가 얼마나 기뻤는지 아냐고 정말 기뻤다고 그때의 마음을 회상하면서 얘길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비록 화상으로 인해 정말 고통스러웠지만 아기가 살았다는 그 사실이 너무 기뻤다는 그 이야기를 어머니한테 듣고 아이가 너무 미안하고 고마워서 엄마를 끌어안고 울었다는 그 간증이었습니다.

그렇죠 너무 엄마의 마음 안에는 그 고통이 사라진 거에요 아기가 살음으로 얼마나 기뻤는지~ 그 기쁨이 엄마한테 있었습니다. 주님 안에 있는 기쁨이라는 것은 십자가를 앞에 두고 기쁨을 얘기할 수 있는 것은, 그 기쁨은 어떤 것입니까?


16:21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이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을 인하여 그 고통을 다시 기억지 아니하느니라

16:22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해산 때가 됐어요 애가 낳아야 되는 해산때가 되면 해산의 고통이 있어서 근심하지만 애를 낳게 되면 고통이 다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라는 것은 그 십자가의 죽음이 있지만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가 다시 살게 되는 생명을 얻게 되는 희생이기 때문에 그 살아난 생명으로 인해 고통이 다 사라지고 기쁨이 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기쁨을 먼저 취하시는 것입니다. 고통이 고통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위한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는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것이니

자기가 살게 된 것이구나! 엄마의 고통으로 자기가 살게 된 것 라는 것을 알게 됐을 때 어린아이가 흉측하게 보였던 상처가 더 이상 흉측하게 보이지 않고 너무 고맙게 보였고, 이후로는 자랑이 됐다고 합니다. 친구들한테 엄마 손을 붙들고 다니면서, 누가 엄마의 얼굴에 있는 흉터에 대해서 물으면, ‘엄마가 내가 어렸을 때 죽을 수 밖에 없었는데 불 속에 뛰어들어서 살리려고 화상을 입은거야라면서 자랑을 했고, 엄마랑 다니는 것을 좋아하게 되었고, 친구들에게 그런 엄마가 자랑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 흉측한 모습이 오히려 자랑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도들에게도 동일합니다. 십자가라는 것은 사형틀입니다. 끔찍한 것 사람을 죽이는 끔찍한 것 강도와 노예들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던 처형의 도구였습니다. 유대인들은 꺼리는 것이고 헬라인에게는 미련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가 우리를 살리기 위해 주님께서 희생하신 지극하신 주님의 사랑임을 깨달은 사도들은 오직 십자가만 자랑했습니다. 십자가를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십자가가 기독교의 상징이 됐었고 자랑이 됐습니다. 그것은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드러났기 때문이었습니다. 흉측했던 상처를 자랑했던 어린아이처럼 사도들은 십자가를 자랑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를 향한 사랑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의 못박히신 것은 죄로 인해 죽을 수 밖에 없는 나를 살리기 위함이구나! 나를 살리신 것이구나! 이것을 깨닫고 난 뒤에 저주의 십자가가 자랑이 되고 기독교의 교회의 상징이 되고 자랑이 됐었습니다. 여러분은 십자가를 자랑합니까?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 합니까?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드러났기 때문에 다시 살게된 생명 어린아이가 불이 난 집에서 죽을 수 밖에 없었는데 다시 살게 된 것처럼 주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다시 살게 된 것입니다. 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 기쁨이 제자들 안에 충만하기를 원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사랑의 감격이 있어야 그 사랑으로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뒤에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요한일서4장에 보면

4: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하나님이 화목제로 우리와 화해하려고 화목하게 하려고 아들을 화목제물로 희생제물로 보내셨다 자기 생명을 다하여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 즉 자기생명 다해 사랑하셨은 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그것이 계명이라는 것 너희를 사랑하는 것같이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키면 주님안에거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많은 열매를 맺게 된다는 것을 본문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따라 많은 열매를 맺는 여러분이 되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