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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잃어버린 양의 비유
 글쓴이 : 에베소
 

본문: 15:1~7

제목: 잃어버린 양의 비유

[성경본문]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원망하여 가로되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비유로 이르시되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일백 마리가 있는데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 다니지 아니하느냐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없는 의인 아흔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오늘 8 30일입니다. 8월은 다지나 같습니다. 여름이 지나갔는데, 9 결실의 계절. 가을로 들어가는 시점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한달 한달 지나가면서 어떤 생각을 합니까? 한달이 지날때마다, 한해가 지날 때마다 천국이 가까워오고 있구나 생각합니까? 이번 주에 비전트립 다녀왔습니다. 8명이 출발했는데, 티켓사정으로 저와 같이 세 분만 같이 돌아왔습니다. 다섯 분은 지금 시간 일본 후쿠오카에서 예배를 같이 드리고 있을 텐데, 돌아보면 그것도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됩니다. 후쿠오카에서 드려지는 예배시간에도 많은 은혜 내려서 하나님께서 크신 역사 이루어지길 기도합니다.

 

본문 말씀 보겠습니다. 누가복음 15장은 정말 위대한 너무나도 소중한 장입니다. 주님께서 세가지 비유를 들어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이냐?’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중에 오늘 보고자 하는 것은 세가지 비유 중에 번째 비유. 잃어버린 양의 비유를 우리가 보고자 합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정황이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상황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1절에서 2절까지는 말씀을 나오게 정황이 어떤 정황인지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15:1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예수님께로 나왔다는 것입니다. 세리도 죄인취급을 했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죄인이라고 취급했던 많은 사람들이 말씀을 들으러 나왔다는 것입니다.

15:2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원망하여 가로되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유대인들은 죄인과 상종하지 않았습니다. 죄인과 같이 대화하지 않을 아니라 밥도 같이 먹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하는 것을 보니 죄인들과 같이 대화할 아니라, 같이 먹는 자리에 같이 하더라는 것입니다. 세리와 죄인들이 주님의 말씀을 들으러 나왔겠습니까? 그들 안에 기쁨이 있었습니다. 말씀을 통해서 그들 안에는 새로운 존재의 용기가 생겼습니다. 세리와 죄인들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세상사람들이 손가락질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존재의 의미를 상실하고 가치를 상실하고, 존재의 용기를 잃어버린 자들입니다. 세상에서 스스로 쓸모없다 생각하는 사람들인지 모릅니다. 우리도 가운데 살아가면서 힘들 때가 있습니다. 어떤 그렇습니까? 내가 무가치하다고 느껴질 힘듭니다. 그것보다 힘들때가 없습니다. 저는 그런 경험을 해본 적이 있습니다. 대학교 다닐 무가치한 존재라는 마음을 품고 있을 때가 있었습니다.   어떤 책을 본적이 있는데, 책을 읽으면 안되겠다고 생각했는데 제목이 참을 없는 존재의 가벼움입니다. 책을 보는 순간, 마음과 너무 일치하는 제목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걸 읽지 않았습니다. 공감할 있어서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기보다는 책을 읽으면 죽을 같다는 생각 때문에 도저히 읽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절대 읽지 않았던, 그러나 제목만은 머리에 박혀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갈 존재의 가치가 무가치하게 느껴질 때보다 힘들 때가 없습니다. 세리와 죄인들은 정말 무가치하게 스스로 느끼면서 살았던 사람들이 아니었나 생각해보게 됩니다. 그들이 주님의 말씀을 들었을 존재의 용기가 생겼고 새로운 소망을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자 했던, 그래서 주님께 나와서 주님과 함께하려 했던 죄인들의 모습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그게 싫었습니다. 주님의 모습이 싫었습니다. 꺼려졌습니다. 우리가 힘들 때도 동일한 모습이 다가오는데, 세상적인 시각 ,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시각으로 죄인들이 자신을 바라봤을 , 자기자신은 죽어야 죄인이고 무가치한 존재로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세상은 세상적인 가치판단의 기준이 있습니다. 사람의 인격이나 내면에 있다기보다는 그가 어떤 능력이 있는가?” “얼마나 가지고 있는가?” 가치평가의 기준이 됩니다. 능력을 평가합니다. 초등학교때부터 점수를 메기고 등수를 매깁니다. 그것으로 사람이 평가되고 판단되는 시대입니다. 영어를 얼마나 잘하고 수학을 얼마나 잘하는지. 전공은 무엇이고 자격증은 얼마나 땄는지. 능력을 가지고 평가하는 사회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그런 세상적인 판단기준으로 우리 스스로를 바라볼 우리는 위축됩니다. 스스로도 그렇습니다. 국가자격증이라고는 운전면허증 달랑 하나 있습니다.^^ 토익이나 토플은 낙담이 될까 못했습니다. 이번에 일본에 가서 본의 아니게 영어로 전도하는 상황이 있었습니다. 일본어도 안되고 통할길이 없으니까, 영어 외에는 통할길이 없었습니다. 일본사람들이 영어를 못하니 자신있게 영어로 말했습니다. 그들이 알아들으면 자신들이 모른다고 생각하니 제가 꿀릴게 없었습니다. 아마 미국에서는 그렇게 영어로 전도 못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찌되었든 세상적인 가치기준으로는 저 만큼 무능한 사람도 없을 것 같습니다. 가진것도 없고 있는 것도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다행스러운 것은 하나님께서는 그런 세상적인 판단기준으로 우리를 보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스스로가 세상적인 가치판단의 기준으로 자신을 평가하고 판다는 단하면서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세리와 죄인들은 율법적인 다른 많은 사람들의 판단기준으로 스스로 바라보면서 무가치하고 쓸모없는 존재로 여기고 살 수 밖에 없는 존재였는데, 주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되니 존재의 용기가 생기고 새로운 희망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비유는 누구에게 이야기하는 것이냐면,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세리와 죄인들보다도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란 어떤 것인가?

 

15:4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일백 마리가 있는데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 다니지 아니하느냐

15:5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15:6 집에 와서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

 

하나님의 사랑은 이런 것이라고 비유를 통해서 이야기하고 계십니다. 아흔 아홉마리를 버려둔다는 것입니다. ‘들에 두고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들에 두고 마리를 찾아 나서는 것입니다. 99 큽니까 1 큽니까? 어떻게 99 들에 두고 1 찾아나 섭니까? 이것을 이성적으로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양을 쳐본 경험이 없기 때문에, 마음을 공감하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유대인들은 목축업을 주로 했던 사람들. 유대인들 안에 공감할 있는 세계입니다. 우리는 공감하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목자의 마음은 어떻게 보면 목자의 존재 목적은 양을 지키고 돌보는 것입니다. 양을 잃어버렸다. 양을 찾을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목자에게는 양이 생명처럼 귀하게 여겨졌다는 것입니다. 돈에 대한 이야기를 뒤에 예수님께서 하십니다. 잃어버린 아들에 대해서 이야기 합니다. 누구나 공감할 있는 얘기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이 있는가? 그것을 잃어버리면,   일을 제쳐두고 하나를 찾으려 한다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하나. 양이 혹여라도 다치지 않을까 혹여라도 가시덤풀에 걸려서 상처입지 않을까, 혹여나 낭떠러지에 떨어지는 위험에 처하지 않을까. 그런 염려가 목자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마음을 가지고 양을 찾아 나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다 라는 것을 주님은 비유를 통해서 이야기하고 계십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이와 같습니다. 사랑의 세계에 있어서는 99보다 1 크다는 것입니다. 불합리합니다. 마리를 희생시키더라도 99마리 양을 지키겠다는 생각이 합리적인 생각이고 이성적인 생각입니다. 99마리를 들에 두고 마리를 찾아 나서는가? 너무나 때문입니다.

 

라이언 일병구하기이라 영화가 있었습니다. 저는 보지는 않았지만 영화의 줄거리를 대충 알고 있습니다. 2차대전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인데 라이언 일병이라는 적진에 잡혀서 죽을 밖에 없는 상황 가운데 있는데, 그를 구하라는 명령이 내려져 얼굴도 알지 못하는 한명의 병사를 구하기 위해 많은 병사들이 죽음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를 구하기 해서는 정말 많은 희생을 감수할 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8명이 가게 되는데, 사선을 넘나들면서 회의에 빠지게 됩니다. 사람을 위해서 우리 모두가 죽음을 무릎써야 하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8명이 때문에 희생해야 되는 것인가? 하나가 어떤 존재이길래 어떤 사람이길래 우리가 이런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구해야 하는가? 라는 이야기가 영화 속에서 오고 갑니다. 평범한 병사 하나를 구하기 위해 8명을 위험에 빠뜨리는 것은 분명 합리적인 생각이 아닙니다. 그러나, 적진에 갇혀서 죽을 수 밖에 없는  라이언 일병에게는, 그들의 희생과 사랑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감동적인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바로 그와 같은 것입니다. 99마리를 들에 두고, 잃어버린 양인 바로 를 찾아 나서시는 하나님인 것입니다. 라이언 일병이 쳐해있는 상황이 바로 나와 여러분이 처한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세상적인 시각으로 볼 때 우리 자신을 아무 쓸모없고 가치없는 존재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있어서 우리는 아주 특별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무엇이 특별한 것입니까?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셨고, 하나님의 자녀로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부모에게 있어서 자녀는 특별한 존재입니다. 우리가 바로 그러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 이 세상에서 나 같은 존재는 딱 나 하나 뿐입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쌍둥이도 다릅니다. 비슷하지만 성격도 다르고, 외모도 다르고, 다릅니다. 하나님께 있어서 나는 특별한 존재구나. 내가 정말 특별한 존재고,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는구나 라는 것을 존재의 용기를 가질 있습니다.

 세상적인 시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바라보시나. 세리와 죄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맛봤던 자들입니다.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은 어떤 것인가? 당신의 생명도 아끼지 않을만큼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양이 얼마나 외로울까, 고독할까, 얼마나 힘들까 라는 마음을 가지고 우리를 찾아오시는 주님의 마음이 그런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외로울 고독할 힘들 무능하다고 느끼면서 지쳤을 , 괴로워할 우리를 찾아오시는 주님. 우리와 함께하시길 원하고 우리와 동행하길 원하시는 마음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이라는 것을 본문을 통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랑이라는 것이 특별한가?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해야 이유가 있습니까?

본문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너희도 그렇지 아니하냐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잃어버린 양이 있을 , ‘99마리를 버려두고 마리를 찾으러 가지 않느냐?’ 너희도 그런 사랑이 있지 아니하냐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무언가가 잃어버렸을 , 버려두고 사랑하는 것을 찾아 다니지 아니하느냐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랑의 마음이 우리에게 심어졌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우리에게 심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우리를 지으셨고, 하나님의 자녀로 우리를 세우셨던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사랑하는가? 자녀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자녀로 지었기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비록 죄적인 모습이 우리 안에 스며들어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형상을 담아서 아름답게 지은 것이구나 라는 것을 주님은 얘기하고 있습니다. 이미 하나님의 형상이 우리 안에 들어와있다는 것입니다. 비록 세리와 죄인들이라 할지라도 이미 형상이 들어와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알기 원합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알길 원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녀를 잃어버린 있습니까? 예전에는 정말 그게 많았습니다. 특히 어린이날 공원에 많이 갑니다. 거기 가면 부모 손을 놓쳐서 잃어버린 미아들이 많이 발생했습니다. 자녀를 잃어버렸을 , 잠을 잡니다. 직장에 나가도, 밥을 먹어도, 잠자리에 누워도 잃어버린 자녀생각 때문에 눈물이 흐르고 밥이 넘어가지 않고 잠을 없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직장도 버려두고 전단지를 만들어서 전봇대에 붙이고, 게시판에 붙이고. 혹시라도 본사람 있으면 사례 할테니 연락 달라고 하면서 일생을 보낸 사람이 예전에 티비 다큐멘터리에 나온 적이 있습니다. 자녀가 지금 어떤 고통 속에 울고 있을지 모르는데 어떻게 밥이 넘어가고 잠이 오겠냐는 것입니다. 이 부모의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자녀를 찾는다면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잃어버린 양을 찾았을 때 99마리로 인해 기뻐하는 것보다 더 기쁘다는 것입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신앙의 길을 간다고 여기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마음과 가까이 있지 못했습니다. 세리와 죄인들이 하나님의 마음과 가까이 있었습니다. 마음에 감동되어서 하나님을 알고자 했습니다. 외형적으로는 겉으로는 하나님과 가까이 있고, 하나되어 있다고 여겼던 이들은 오히려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멀리 있었던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모습입니까? 우리의 모습도 어찌 보면 이럴 있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같은 모습이 우리 안에 있지 않은지 돌아보기 원합니다. 그들의 삶이 그랬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옷에 기록해놓고 그걸 보면서 지키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마음으로부터 유리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되어있어야 그들의 모습이 유리되어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 우리는 비록 죄인의 모습이 우리 안에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하나님의 마음과 가까이 하려는 모습이 우리 안에 있어야 믿습니다.

 

우리가 어떨 아픔이 있습니까? 여기 가정도 있는데 아내가 음식을 사서 준비를 하고 저녁식사를 준비했는데 정작 남편이 잊어버린 , 알지도 못한 , 늦게 먹고 들어왔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아내의 마음은 정말 속이 상합니다. 준비해놓고 오기만을 기다렸는데, 연락도 없고 전화도 안받습니다. 아내의 마음은 정말 마음이 상하고 화가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남편이 무슨 나쁜 짓을 했습니까? 무슨 나쁜 짓을 아닙니다. 그러나 준비하는 사랑을 알지 못한 것입니다. 누군가를 정말 사랑하면 정말 그가 좋아하는 . 원하는 바라는 것을 알고자 하고 그것을 주고자 합니다. 어떤 사람이 여자친구가 좋아하는지 알았습니다. 그런데 여자친구는 그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녀가 좋아하는 최고의 것으로 준비해서 선물을 주려고, 마음을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정말 정성껏 만들어서 줬는데 받질 않습니다. 선물을 받아주기만을 바랬고, 기뻐해주기만을 기대했는데, 선물을 받지 않을 , 마음이 정말 아픕니다. 하나님의 아픔과 고통은 인간이 사랑을 외면하고 사랑을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안에 있는 고통이고 하나님 안에 있는 아픔인 것입니다.

 

죄인은 무엇입니까? 아담의 죄는 무엇입니까? 도둑질하고 누구를 때린 것이 아니라, 사랑을 오해하고 불신 것이었습니다. 우리 안에도 이런 모습이 있다는 것입니다. 자녀가 부모의 사랑을 외면해버릴 , 부모의 마음이 아픕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고통과 아픔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외면하고, 하나님의 사랑과 멀어져 있을 , 알아주지 못할 하나님의 아픔과 고통입니다. 어떻게 보면 하나님의 사랑을 외면한 . 그것이 인간 안에 있는 가장 죄라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도 사랑을 유린하는 것으로 인해 하나님과 동일한 아픔을 경험합니다.

아내가 모든 음식을 준비해놨을 , 아무 연락도 하지 않고 오지도 않는 모습. 정말 화납니다. 어떤 나쁜 말도 하지 않고, 남편이 나쁜 행위를 없지만,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 것이 나쁜 것입니다. 죄인은 어떤 것입니까? 하나님 사랑으로부터 떠나있는 입니다. 여기 있는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사랑을 깊이 자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처럼 하나님의 마음에서 멀리 있을 수 잇습니다. 그래서 계시록에서는 에베소교회에 이야기합니다. 저희 교회죠? ^^ 저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라 여기고 들었으면 합니다. 계시록 2장에 보면

 

2:2 내가 행위와 수고와 인내를 알고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2:3 네가 참고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2:4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처음 사랑을 버렸다는 것입니다. ? 그게 제일 중요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하나님께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을 노력하고 애쓰고, 나의 행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드리고자 하는 모습들. 그게 귀한 것이지만. 그러나 안에 사랑의 동기를 잃어버렸을 , 사랑의 모습을 잊어버렸을 , 껍데기가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고 주님께서 진정으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 그것을 알고 사랑 안에 거하길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아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정말 사랑하면 사람에게 바라는 것은 하나입니다.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아주기 바라는 하나입니다. 다른 필요 없습니다. ‘ 마음이 어떤지 아니?’ 이야기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런 말씀을 하고 계신지 모릅니다.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냐고. 마음을 알아주길 원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랑 안에 거하게 , 주님과 만나게 , 하나될 , 아흔아홉을 인해서 기뻐하는 것보다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떠난 죄인이 돌아왔을 때의 기쁨은 말로 형용할 없는 기쁨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열손가락 아들이 있어도 정말 고통가운데 있는 아들 하나가 회복되었을 때의 기쁨은 말할 없습니다. 어떤 자녀들은 못난 자녀에게 사랑이 간다고 합니다. 잘된 자녀들에게 마음에 오히려 갑니다. 자녀에게 신경이 쓰입니다. 그리고 그가 잘될 , 고통가운데 벗어났을 내가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이야기하는 부모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아픔가운데 있을 , 눈물 흘릴 , 하나님이 눈물 흘리시고 아파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사랑을 알길 바란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우리들 안에 잃어버린 하나님의 사랑이 있다면 첫사랑을 회복하라는 말씀을 기억하고, 사랑을 마음가운데 담아서 하나님께 기쁨이 되고 우리는 주님 안에서 즐거움을 얻는 모습이 되길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