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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글쓴이 : 에베소
 

본문: 8:5~13

제목: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성경본문]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여 가로되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와하나이다 가라사대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백부장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좇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 보지 못하였노라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시로 하인이 나으니라

 

안녕하세요 날씨가 많이 쌀쌀해 졌습니다. 환절기에 감기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보고자 하는 말씀은 로마 백부장에 관한 말씀입니다. 왜 이방인의 이야기가 성경에 기록되어있을까? 이 이야기가 주님께 감동을 주었을 뿐 아니라 많은 믿는이들에게 교훈을 주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본문 말씀을 통해서 주님을 감동을 줄 뿐 아니라 믿음을 통해서 주님의 능력을 맛보는 우리 모두가 되길 바랍니다.

본문에 들어가 보겠습니다.


백부장이 주님께 와서 간청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그랬더니 주님께서 내가 가서 고쳐주리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와 대조적인 내용이 하나 더 있는데, 15장에 가나안 여인의 모습이 나옵니다. 이 여인도 주님께 나아와서 자기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으니 고쳐주옵소서 하지만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백부장에게는 내가 가서 고쳐주리라 하셨습니다. 둘 다 이방인인데 그들을 대하는 주님의 모습이 사뭇 다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차별 하시는 것입니까? 신분이 높은 백부장이라서 특별대우를 해주는 것입니까? 가나안 여인을 대하는 주님을 모습을 더 보도록 합시다. 가나안 여인의 간청에 주님께서 한 말씀도 안하시니 제자들이 주님께 여자를 보내라고 합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나는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고 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여인은 도와달라 간구합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더 심하게 대하시는데,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매몰차게 대하실 수 있을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주님께 간구의 기도를 올립니다. 그럴 때 우리를 대하시는 주님의 모습이 내가 가서 해결해 줄께하는 모습처럼 즉각적으로 응답이 올 때 우리가 오히려 깜짝 놀랍니다. 너무나 즉각적인 응답에 놀라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종이 이삭의 아내 리브가를 찾을 때 우물가에서 기도하는데 즉각적으로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우리의 기도에 주님께서 이렇게 응답하신다면 얼마나 기쁘고 감사한 것입니까? 그런데, 때로는 이 여인에게 대하신 것처럼 아무런 응답도 아무런 대답도 없는 모습도 우리는 경험하게 됩니다. 아무리 간구해도 주님께서 침묵하는 것같은 모습을 경험합니다.


백부장과 가나안 여인을 대하는 주님의 사랑에 차별이 있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주님의 사랑은 아무런 조건이 없고 차별이 없습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다르게 대하시는지 우리는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여인을 대하는 주님께서는 겸손하게 나오길 바라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안에 교만함으로 말미암아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하나되지 못했던 모습이 있었기 때문에 이 여인은 겸손한 마음으로 나아오기를 바라셨다는 것입니다. ‘자녀의 떡을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라고 하셨을 때 이 여인은 옳소이다 마는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면서 주님께 더 나아왔다는 것입니다. 이 여인의 음성을 들었을 때 주님께서는 그래 그거야!’하면서 마음이 화창하고 기뻤을 것입니다. 여인을 박대하려고 박대한 것이 아니라 겸손한 모습으로 나아오길 바라는 마음으로 그리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 여인처럼 즉각적인 기도 응답이 없다 할 지라도 지극히 겸손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께 더 나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왜 이 백부장에게는 즉각적으로 가서 고쳐주겠노라고 하셨습니까? 주님께서 이 백부장의 모습을 보고 감동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마음에 울림이 있었습니다. 백부장은 누구입니까? 로마 백부장입니다. 이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이 백부장은 지배국가의 통치자의 일원으로서 신분이 높은 사람으로 이스라엘 땅에 와 있는 것인데, 이 백부장이 이름없는 청년 예수를 찾아온 것입니다. 하인들이나 군인들을 시켜서 예수를 데려오라 할 수 도 있었을텐데, 오히려 청년 예수를 찾아와서 간청하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자기 지위와 신분을 생각하지 않고 예수를 찾아온 것입니다. 데체로 신분이 높은 사람이나 많이 가진 사람은 자신의 체면을 중시합니다. 자신보다 신분이 낮은 사람에게 찾아가서 아쉬운 얘기하고 사정한다는 것을 비굴하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백부장은 도데체 무엇때문에, 무엇을 위해서 자신의 지위와 체면을 다 내려놓고 예수를 찾아온 것입니까? 하인이 중풍병으로 인해 고통 중에 있으니 고쳐달라는 것입니다. 하인을 위해서 하인을 대신해서 왔다는 것입니다. 이 당시 하인은 소유물에 불과했습니다. 많은 하인 중에 하나가 죽는다 할 지라도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을 시대였습니다. 그런데 이 지위가 높은 백부장이 하인 하나가 고통 중에 신음하는 것을 보고, 자신의 아픔과 고통으로 여기고 주님께 나아온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사랑의 용기>입니다. 소유물과 같은 하인일 지라도 그를 사랑하여서 자신의 신분과 체면을 다 내려놓고 주님께 나아온 것이야 말로 진정한 사랑의 용기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기 비움과 자기 낮춤입니다. 이 백부장의 모습을 보고 주님은 감동을 받은 것입니다. 율법적인 삶 가운데는 이런 감동이 없습니다. 이런 사랑 안에서 감동과 감격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매일 매일의 삶이 이런 감동이 있는 삶이 되길 원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이런 감동이 있는 삶이 되길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하나님과 동등되었지만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셔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2:5~8) 주님은 왜 자신을 비우시고 낮추셔서 십자가의 길도 마다하지 않고 가신 것입니까?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아픔과 우리의 질고를 대신 지시고 그 십자가의 길을 가신 것입니다. 이 주님의 모습이 백부장의 모습에 보여지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하인을 향한 사랑으로 인한 백부장의 자기 낮춤과 자기 비움의 모습을 보고 감동 받으셨으며 내가 가서 고쳐주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에게 있는 이웃과 형제들을 사랑함으로 우리는 낮추고 비움으로 주님께 감동을 주는 우리 모두가 되길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가 가진 지위와 체면은 어떤 것인가 생각을 해보게 되었습니다. 대단한 지위를 가진 것이 없고, 체면도 내세울 만한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자기 비움과 자기 낮춤이라는 것이 우리에게는 쉬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내려놓을게 많지 않잖습니까? ^^ 그런데 우리가 또 전도를 해보면, 내려놓을 것이 없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전도의 자리라는 것이 한편으로는 구걸하는 것같고 사정하는 것 같습니다. 실상은 그것이 아니지만 그와 같은 모습으로 접근을 하게 됩니다. 주님께서도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그런 자리가 싫어 보일 수도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내려놓을 것도 없고 낮아질 것도 없는 자리가 아닌가 하지만, 더 낮아지려 하면 또 꺼려지는 모습이 없지 않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가 돌아봐야 할 것은 우리 안에 하나님을 안다하고 사랑을 안다하지만, 정말 사랑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가입니다. 형제를 향한, 이웃을 향한 무관심과 무정함이 있지는 않나? 형제들이 이웃들이 고통받고 신음하고 있는대도 불구하고 내 생각과 내 사정에 갇혀서 아무런 관심도 주지 못한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사실 율법세계에서는 무관심과 무정함이라는 것은 죄가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은혜의 세계 복음의 시대에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사랑하지 않는 것이 죄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애초에 우리를 지으신 것은 사랑하고 살게끔 지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키므로 그의 사랑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나의 계명을 지켜 나의 사랑안에 거하라 하셨습니다.(15:10) 그러면서 나의 계명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사랑하라는 새계명을 받은 것입니다.


[요일3:10]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께 속한 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 더 찾아보겠습니다.

[요일4:7~8]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을 알면 형제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고,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신앙의 길을 가다보면 지식적으로는 알면서고 마음으로 안느껴진다고 하는 이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부모의 사랑을 잘 모르겠다고 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 어떻게 하면 됩니까? 부모의 마음을 알려면 자식을 키워보면 알 수 있습니다. 자식을 키우면서 아~ 내 부모가 나 키울 때 이런 마음이었겠구나~!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목양의 길도 같습니다. 목양을 하면서 아~ 내 인도자가 이런 마음이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됩니다. 주님의 사랑을 아는 것도 그와 같은 이치라 생각합니다. 형제를 사랑하면서, 별 사람들이 다 있을 테지만, 그런 형제들도 사랑하면서 우리를 향한 주님의 마음을 조금씩 느껴갈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마땅한 자를 사랑한 것이 아니고 사랑할 만한 이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어떠해야 합니까? 비록 찌르는 모습이 있다 할지라도 우리가 형제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백부장의 모습을 하인이 알았을 때 얼마나 감동을 받았겠습니까? 우리 안에도 이와 같은 사랑으로 인한 감동과 감격이 있는 우리의 모습이 되길 바랍니다. 우리 모두가 서로에게 감동과 감격을 주는 모습되길 원합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보이신 주님의 사랑을 드러낼 때 그리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형제요 지체인데 한 지체가 아프고 힘들면 온 몸이 아프고 힘든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가 무감각해진 모습은 없는지 돌아보기 원합니다.


우리가 이런 백부장의 마음으로 주님앞에 기도하고 간구할 때 주님께서 즉각 응답할 줄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친구가 왔을 때 먹을 것이 없어서 밤 늦게 와서 강청하면 비록 친구라 하여 주지 않을지라도 그 강청함을 인하여 소용대로 주리라 하셨습니다. 그 사랑을 인하여 강청하면 소용대로 준다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으로 우리가 주님께 나아가길 원합니다.

 

이외에도 주님을 깜짝 놀라게 한 모습이 백부장에게 있었는데 그것이 무엇입니까? 주님이 전혀 기대하지 않고 예상하지 않았던 모습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깜짝 놀래고 기이히 여겼다는 것입니다. 내가 가서 고쳐주리라 하는 주님의 말씀에 백부장은 주님의 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 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라고 한 것입니다. 백부장 자신도 누구 수하에 있는 것이고 또 자기도 수하에 군사가 있으니 명령하면 그대로 된다는 것입니다. 하물며 왕 되신 주님께서 자신의 집에 오시는 것을 감당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말씀만 하시면 다 그대로 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이 백부장을 보고 쫓는 자들에게 말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다고 하셨습니다. 백부장은 주님의 권세를 알아보고 그것을 믿은 것입니다. 그 믿음을 통하여서 백부장은 주님의 능력을 맛보게 된 것입니다. 우리도 이 백부장의 믿음을 통해 주님의 능력을 맛보는 자들이 되길 원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주님의 능력을 역사하심을 맛 볼 수 없습니다.


왜 주님은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좇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는 처참한 말씀을 하실 수 밖에 없는 것입니까? 정작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을 받은 이스라엘은 왕으로 오신 주님의 권세를 알아보지 못했고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아담안에 있는 죄라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하나님을 왕으로 여기지 않고, 그 말씀을 왕의 명령의 여기서 살았어야 할 아담이 왕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은 것이고, 아버지를 아버지로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하며, 마음에 하나님 두기 싫어했다는 것입니다. 이 아담과 같은 모습이 이스라엘 역사가운데 많이 나타나는데, 사사기에도 그러했습니다.

[21:25]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였더라


사사시대에는 왕이 없던 시대였습니다. 왕이 없으므로 왕이 필요했다는 것입니까? 이스라엘이 왕을 세워달라고 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정말 마음 아파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왕되신 하나님을 왕으로 여기지 않고 왕으로 섬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려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과 판단에 따라서 행동하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말씀에 근거해서 따져보지 않고 각자 자신의 주관과 생각에 따라 판단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우리 안에 율법적인 생각이 배어있습니다. 무관심과 무정하게 살아가는 것이 세상에서는 문제가 안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말씀이라는 거울을 통해서 우리 자신을 비쳐보고 고쳐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는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든 부모의 모습을 닮아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기본적으로 아담의 후손으로서 우리 안에 아담 DNA가 나도 원치 않지만 내 안에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아담의 죄가 왕 노릇 했던 나의 모습이 있습니다. 그런 죄적인 나의 모습을 말씀을 통해 발견하고 제거해 나가야 합니다. 말씀은 거울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발견한다는 것은 희망적인 것입니다. 죄는 기본적으로 은폐의 속성이 있습니다. 죄는 가려져 있고 은폐되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거울을 봐야지 얼굴에 뭐가 묻어 있는지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까?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매일 거울을 통해서 자신의 모습을 봅니다. 이렇듯 우리는 말씀을 통해 우리 자신을 봐야 하고 깨끗케 해야 합니다.


어떤 친구가 같이 식사를 하고 얼굴에 뭐가 묻었는데 아무 얘기를 안 해주면 이게 좋은 친구입니까? 부끄러운 것이니 알게 해 주고 뗄 수 있게 해줘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안 알려주면 그것도 모르고 하루 종일 돌아다닐 것이 아닙니까? 뭐가 묻은 것도 알지 못한 채 하루 종일 돌아다닌 것이 부끄러운 것이죠. 빨리 알고 빨리 제거하면 좋은 것입니다. 죄를 지적해 주는 것이 때로는 싫고 괴로운 것이 될지 모르지만, 죄를 지적해주는 것은 제거하라는 것입니다. 죄를 깨닫게 해주는 이에게 그래 너 잘났어하면서 면박을 줄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많은 세상 사람들이 죄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죄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서 죄를 깨닫게 해주는 것이 좋은 것이고 감사한 것입니다. 죄에서 벗어 날 수 있는 첫 단추와 같은 것입니다죄를 알지 못한 채 어떻게 죄에서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밥풀이 묻어있는지 알지 못하고 어떻게 제거하겠습니까? 묻어 잇는데도 알지 못한 채 하루 종일 돌아다니는 것이 부끄러운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서 우리 자신을 돌아봄으로 우리 자신의 죄를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백부장의 모습은 주님을 왕으로 인정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은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섬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이 주권과 통치를 인정하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왕으로 오신 주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 이방 백부장이 오히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겠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쫓겨나 이를 갊이 있을 것이라는 비참한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습니까? 그것은 단순합니다. 우리의 잃어버린 자리를 찾으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주님으로 인정하고 그 주권과 통치를 받아드리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으로 통치하시기에 말씀을 주님의 명령으로 인정하고 순종하여 살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아버지로 여기고 살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 받은 자이며, 하나님의 자녀로 세움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러나 이 전에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살지 못했던 죄적인 모습이 있기 때문에, 그 죄적인 습관성을 벗고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을 받았지만, 왕되신 주님을 인정하지 않았고 받아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로마의 백부장이 왕되신 주님의 권세를 알아봤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권세와 능력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 믿음을 바라본 주님이 놀랐고, 가서 고쳐주겠다는 주님의 말씀이 가라 네 믿음대로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왕되신 주님의 주권과 통치를 믿음으로 능력을 맛보고, 또 사랑으로 인해 주님께 감동을 줄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