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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예배] 사함을 적게 받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글쓴이 : 에베소
 

본문: 눅7: 36~47

제목: 사함을 적게 받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성경본문]

7:36 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시기를 청하니 이에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에

7:37 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아 계심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7:38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7:39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이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더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

7:4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하시니 그가 이르되 선생님 말씀하소서

7:41 이르시되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7:42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

7:43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내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이르시되 네 판단이 옳다 하시고

7:44 그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올 때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닦았으며

7:45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7:46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7:47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이 장면 굉장히 중요한 장면. 유명하고 많이 알려져 있는 장면. 한 여자가 예수님께 향유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발 곁에 서서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그 발에 입 맞추고 향유 붙습니다. 이 여자는 동네의 한 죄인인데, 죄인으로 유명했던 모양이 입니다. 그런데 이여자가 울면서 주님 발에 향유를 붓고 이런 행위를 했다.

 

지금 이 분위기는 어떠냐면 정말 은혜롭다 하는 그런 분위기가 아닙니다. 긴장이 흐르는 장면. 여기 갑자기 와서 누가 갑자기 발을 씻는다 생각해 봅시다. 다들 분위기가. 뭐 하는 거야. 그런 분위기가 되지 않겠어요. 그것도 여자가 남자의 발을 씻는 것. 이러한 행위가 일어났을 때 그 분위기가 결코 감동을 받을 분위기가 아니지 않습니까? 더욱이 그 여자는 동네에 소문난 죄인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여자는 상종치 않았고 특히 죄인과는 불결하게 여겨서 접촉도 안 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 장면의 분위기는 이 여자가 왜 이래~ 하는 것과 예수님은 뭐지.. 왜 가만히 있지? 이 여자가 죄인인 것을 모르나? 이런 정서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지금 하나의 비유를 딱 이야기해주시는 것입니다. 이 분위기를 쏵 바꿔놓으십니다.

 

옛날 어떤 마을에 어떤 현자가 있었다고 합니다. 고상한 집이 있었는데 그 집에 어떤 사람이 어떤 거지가 와서 날마다 와서 밥을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거기 종들이 있었겠죠. 맨날 와서 밥을 달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밥을 줬어요. 근데 또 오고 또 오고. 그러니까 너무 귀찮았습니다. 어휴 왜 자꾸 와. 거지를 보면서 그런 마음을 가졌습니다. 어제 왔으면 됐지 왜 또 오고 또 와~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 현자의  제자가 저 사람 맨날 와서 귀찮게 밥 달라고 한다고 그랬더니 이 스승이 뭐라 했냐면 그 사람이 너를 도와주는 사람이다. 이렇게 한 마디를 딱 한 것이었습니다. 그 얘기가 제자의 가슴에 탁 남은 거예요. 무슨 말이지? 뭔가 깊은 세계를 말하는 것 같은데, 깊이 이해는 안 가지만 뭔가 딱 남았습니다. 그리고 갔다. 그 다음에 스승과 남았을 때 스승한테 물어봤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 십니까? 그가 나를 돕는 사람이라는 게 무슨 말 입니까? 내가 밥을 주니까 내가 돕는 사람이 아닙니까? 근데 어떻게 그가 나를 돕는 사람이죠? 그러니까 스승이 이렇게 말했다. 그 사람이 날마다 너한테 와서 구걸하니까 네가 날마다 선한 일을 하게 되잖니. 그 선한 일을 통해서 네가 선해지잖니. 그 사람이 너를 선한 사람으로 만들어주고 있잖아! 그래서 그 제자가 그렇게 깨달았다고 합니다. . 전혀 새로운 시각입니다.

 

지금 이 본문의 장면도 유사하게 볼 수 있습니다. 한 죄인의 여자가 와서 예수님의 발에 향유옥합을 깨뜨리고 울면서. 그랬을 때 분위기는 저렇게 더러운 여자가 발을 만지는데 왜 가만히 있는 거지, 참 문제가 있다. 왜 저럴까? 예수님이 고상한 분이라면 그걸 딱 알고 감히 내 발을 만져. 그랬을 텐데..

예수님께서 그걸 알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지적하지 아니하시고. 내 말을 한 번 들어봐라. 하면서 얘기하시는 것입니다.

 

빚진 자가 둘이 있다. 하나는 50, 하나는 500 데나리온. 500데나리온은 굉장히 많은 돈. 한데나리온은 노동자 하루 품삯. 500데나리온은 2년치 좀 못 되는 많은 돈입니다. 그렇게 커다란 빚을 졌다. 500 빚진 자와 50 빚진 자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근데 똑같이 탕감해줬다. 그럼 누가 더 감사하겠니? 누가 더 감사하고 누가 더 사랑하겠니. 베드로가 이 얘기를 듣고 베드로가 바보는 아닙니다. 속히 대답을 합니다. 당연히 500 빚진 자이죠. 빚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있어 뭐냐. 다른 말로 죄입니다. 우리의 빚은 다른 말로 죄다. 죄를 많이 진 사람도 있고 조금 진 사람이 있었을 때 똑같이 용서 받으면 누가 더 감사하겠는가? 누가 더 그 은혜에 대해 감사하겠는가? 누가 더 사랑하겠는가?

 

유명한 죄인 여자. 그 죄가 용서됐을 때 그게 너무 감사한 거였습니다. 이 여인은 남을 의식하지 않았습니다 남이 뭐라 하든지. 자기 안의 감사함을 표시하는 것. 자기 안의 감동을 그 안에 있는 감사함을 그 안에 있는 사랑을 이것을 정말 아끼지 아니하고 숨기지 아니하고 이것을 다 주님 앞에 드러낸 것입니다.

 

우리가 이 얘기를 들으면서 생각해봐야 할 게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인가? 우리는 빚이 많은 사람인가? 빚이 적은 사람인가? 내가 죄가 많은 사람인가? 죄가 적은 사람인가? 다른 말로 얘기하면 여러분 안에 우리 안에 감사함이 많으냐? 어떤 사람이 감사함이 많은가? 내가 죄인이라는 걸 깊이 깨달을수록 감사함이 커지는 것입니다. 반대로 얘기하면 내가 감사함이 없다는 얘기는 그 말은 내가 의롭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죄가 없다 하면 감사해질 게 없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우리가 어떨 때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눈물을 흘릴 수 있는가? 이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우리가 어떨 때 감사함을 가질 수 있는가? 그것은 내가 죄인임을 깨달을 때, 내 안의 죄가 너무 크다는 것을 깨달을 때, 이걸 깊이 깨달을 때 예수님의 십자가를 더 깊이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십자가 말씀을 듣고 십자가만 생각하면 눈물 콧물 다 쏟으면서 기도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똑 같은 십자가에 대한 말씀을 들어도 아무런 감동도 눈물도 없습니다. 그러면서 자신도 저렇게 은혜를 경험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이도 있습니다.  어디에 차이가 있습니까? 자신의 죄에 대한 깊은 자각, 깨달음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죄인이라고, 내 스스로는 어찌할 수 없는 죄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시인하는 마음이 있을 때 십자가는 자신을 구원한 대속의 십자가가 되는 것이고, 사랑의 십자가, 능력의 십자가가 되는 것입니다.

 

사도 중 유명한 사람이 있잖아요 사도바울. 그는 뭐라 했냐면 나는 죄인의 괴수다. 그가 깨달은 것입니다. 아 내가 나 같은 죄인이 없어. 죄인 중의 죄인이야. 그가 그것을 깊이 그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고백했습니다. 그는 정말 그의 이전의 삶이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었고 유대인 중의 유대인이었고 정말 경건해 보이는 삶을 살았던 사람인데 정말 율법을 철저히 지켰던 사람. 정말 모범적인 신앙을 살았던 사람. 그랬던 사람인데 그러나 그 전에 그는 그가 죄인임을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3:5~6] 내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겉으로는 율법을 철저히 잘 지켰던 사람. 그리고 자기가 의롭다고 생각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을 만나고 깨달았습니다. 내가 정말 죄인이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우리 안에 참 신앙이 빚나가기 쉬운 것이 내가 나를 의롭다 여기는 것입니다. 이 정도면 괜찮지. 이 정도면, 내가 이렇게하고 있고 이 정도면 죄인 아니잖아. 세상에 죄인이 얼마나 많은데 비교하면 나는 얼마나 의로운가..  이렇게 생각하고 살 때가 있습니다. 이게 바리새인들이 가진 전형적인 율법적인 신앙입니다. 그 때 우리 안에 감사가 사라집니다. 감사가 사라지면 메마르게 됩니다.

 

바울은 정말 예수님을 만나고 십자가의 의미를 깨닫고 그 십자가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죄인이라는 걸 깨달았다는 것. 그래서 나는 죄인의 괴수다라고 고백합니다. 내가 정말 죄인이라는 것을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주님의 사랑이 너무나 크게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을 보기 이전에 우리 마음 안에 있는 낮아지기 싫어하고 섬기기 싫어하는 교만과 베풀지 않는 이기심, 자기만을 사랑하고 이웃에 대해 무관심하고 무정한 모습 .. 이와 같은 죄적인 모습이 내 안에 없는지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바울은

[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자기 자신도 자신 안에 있는 죄를 어찌할 수 없는 사망가운데 거한 나임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런 자신을 건질 수 있는 것은 오직 나를 위해 내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못박혀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감격하고 감사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사도바울처럼 내 안에 거룩한 척하고 깨끗한척하지만 나도 어찌할 수 없는 죄적인 모습을 발견하고 처절한 죄인의 모습으로 십자가 앞에 서야 할 것입니다. 그 때에야 비로소 십자가는 나에게 생명이요, 유일한 구원의 길이 되는 것입니다.

 

이 여인은 스스로 큰 죄인으로 여겼기에 주님의 은혜를 크게 경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내가 의롭다 함이 없고, 내가 정말 죄인이다. 이 정직한 고백, 이 겸손, 이 고백이 이 정직함이, 바로 주님의 사랑을 정말 제대로 깨닫게 해주는 통로가 된 것입니다. 그럼으로 이 여인이 이렇게 주님의 그 사랑 앞에서 그렇게 감동하면서 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많다고 했습니다. 그러기에 죄를 더 지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내재되어있는 숨어있는 죄에 대한 깊은 인식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바울보다 율법적으로 훌륭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죄인의 괴수라 했습니다. 죄에 대한 깊은 인식과 깨달음이 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 보여주신 모습은 무엇인가? 이 여인이 잘 했기 때문에. 이 여인이 회개를 했기 때문에, 여인의 행동이 바뀌었기 때문에 용서하시고 사랑하신 게 아닙니다. 조건 없이 먼저 용서해주신 것. 먼저 사랑하신 것입니다. 그 사랑이 이 여인을 녹인 것이고 이 여인을 바꾼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사랑이 이런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베풀어야 할 사랑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여전히 우리가 율법적으로 살고 율법적으로 생각하는 게 많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그분이 일방적으로, 조건 없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사랑. 그 은혜,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그것이 우리 안에 들어와서 우리가 바로 그 복음의 방식대로 살 때 우리가 따뜻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내재되어있는 죄에 대한 깊은 인식과 깨달음을 통해서, 그런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위해 자신의 생명까지 아끼지 않으시고 십자가에 내놓으신 그 은혜와 사랑에 감동하고 감사하는 삶을 사는 우리 모두가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