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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받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글쓴이 : 에베소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받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1: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2:36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3::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3:26 곧 이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공적인 사역의 기간은 3년이었습니다. 3년간의 사역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사명을 모두 이루셨습니다. 그리고 3년의 공생애를 압축해서 본다면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셨던 3일이라고 볼수 있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안에 예수님의 모든 사역의 메세지가 다 담겨져 있고, 3일의 기간을 우리는 주목해서 봐야합니다. 또한, 제자들이 복음서를 통해서 전하고자 했던 포커스도 이 3일이었고, 3일을 잘 묵상하고 꼼꼼하게 보아야 합니다. 복음서의 가장 핵심이고, 성경의 가장 핵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금요일에 수난을 당하시고 일요일에 부활하셨습니다. 안식일은 원래 토요일이었는데, 기독교는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기 위해 안식일을 주일로 바꾸었습니다. 그만큼 이 3, 그리고 십자가와 부활에 대하여 우리가 분명히 이해하는게 너무 중요합니다.

초대교회는 이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이해가 분명했습니다. 이것을 깨닫고 그들의 삶은 근본적으로 변화되었습니다. 넘치는 사랑의 만족과 감동으로 그리스도를 증거했고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형제를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선뜻 내놓는 비움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생명력이 있어서 전파되는 곳에 어김없이 세상이 변화되고 뒤집어졌습니다. 저들은 어떻게 이렇게 살수 있었을까요? 오늘날의 기독교는 어떠합니까. 예배가 있고 친교와 사랑이 있지만 분명한 것은 초대교회의 삶과는 많이 다릅니다. 분명 같은 십자가를 바라보고 같은 주님을 믿는데 왜 이렇게 삶이 다를까요? 우리가 정말 이것붙들고 기도해야합니다. 혹시 내가 십자가를 잘 모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초대교회 제자들은 십자가를 바라볼 때 밀려오는 감정이 달랐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볼때 한쪽면만을 바라보고 있는지 모릅니다. 주님의 사랑에 뜨거워지고 넘침이 있길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십자가를 제대로 이해해야 합니다.

십자가라는 것은 사실 당시 시대의 사형수의 처형의 도구였습니다. 예수님뿐 아니라 많은 이들이 십자가에 달려 죽었습니다. 이 십자가가 기독교의 상징이 된 것은 이 죽음안에 담긴 의미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 죄 없으신 분의 희생, 그 죽음으로 열리게된 속죄의 길. 하나님께서 선민, 즉 유대인들에게 가르쳐주셨던 제사법이 있었습니다. 16장에 잘 나타나있는데, 흠없는 어린양에게 자신과 이스라엘 모든 민족의 죄를 전가하여 그 양을 성문밖 광야로 내보냅니다. 그럼 그 양은 사나운 짐승들에 의해 희생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민족의 죄를 사해주시는 그러한 제사를 일년에 한번 꼭 드렸고, 속건제의 안식일은 큰 명절이었고 안식일중 안식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날이 이 안식일 전날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셨지요. 아들이라함은 아버지와 절대적으로 하나된 관계를 말합니다.

14:10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내가 그안에 있고 그가 내안에 있는 관계, 절대적으로 하나된 관계. , 사랑의 관계입니다. 조금도 내것이 없는 관계. 예수님은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가 그러한 관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내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완전한 하나입니다. 나의 모든 말이 그의 말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의 자리에 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8: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8: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구원에 담겨있는 가슴떨리는 의미를 우리는 잘 알아야 합니다. 참으로 진지하게 구원에 대하여 묵상하고 구원에 확신을 갖는 일, 구원이 애매해질 때 우리의 삶 전체가 모래성위에 지은 것처럼 흔들릴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앞에 진실되게 엎어져서 구원의 확신을 붙들고 매달리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고, 이것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구원의 확신은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죄인에게는 이 사랑이 용서라는 형태로 다가오죠. 이 사랑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 사건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여러분에게 십자가는 사랑으로 다가오십니까. 그 사랑이 내 인생을 송두리째 변화시키는 사랑으로 다가오십니까.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볼 때 주님의 죽음에 주목합니다. 그분의 죽음으로 내가 죄사함을 받았다는 것에 초점을 둡니다. 예전에 유명한 영화가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수난을 다룬 영화인데, 매우 소중한 영화입니다. 그 영화에서 주로 다루는 부분은 그리스도의 고통, 아 십자가라는 형벌이 저렇게 처참한 우리 주님이 지신 십자가가 저런 고통이었구나. 고통받는 주님의 모습을 매우 사실적으로 그렸습니다. 주님의 고통을 바라보며 나를 위하여 그 고통을 참으셨음에 우린 눈물을 흘리고 나를 향한 사랑을 확인합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이죠.

오늘 읽은 본문으로 돌아가서 베드로의 설교에서 요한사도의 증언에서 제자들이 십자가를 바라볼때 그들은 죽임을 먼저 이야기합니다. 죽임! 그리스도의 죽음이 있지만, 그것은 죽임이었다는 것입니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백성이 영접하지 않았고,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박아 죽였다. 여기서 너희는 누구입니까. 자기백성은 누구입니까. 이스라엘백성, 즉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이 준비하신 백성들입니다. 메시야를 보내겠다는 예언을 가지고 있었고 오랜세월 하늘을 바라보며 메시야를 기다렸던, 하나님께서 수천년간 먹이시고 입히시며 그리스도의 이 한날을 위해 준비하셨던 그 백성들. 그러나 너희가 죽였다는 것입니다.

복음서를 천천히 읽어보십시오. 예수님이 직접 십자가에 달아달라고 하신적이 없습니다. 유대인들, 그리고 당시 유대인의 지도자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그들이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칩니다. 빌라도는 풀어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선민중의 선민, 가장 먼저 그리스도를 알아보고 영접했어야 할 그시대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잡았고, 죄없으신 분을 세상 법정에 세워 죽입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에겐 죄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외칩니다. 죄가 있다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다고. 이 비극적인 장면을 보십시오. 빌라도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인데, 그말에 두려움을 느낍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그래서 어떻게든 살리려고 하죠.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의 맹렬한 외침, 죽이라 십자가에 못박으라. 죽이지 않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다. 끝내 십자가에 달리십니다.

십자가는 죽임!이었습니다. 죽임. 우리가 이것을 봐야합니다. 우리앞에 달려있는 십자가가 우리에게 어떻게 오게 된 것인지를 봐야합니다. 결과만을 보면 안되고, 과정까지 봐야합니다. 이방인들이 죽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자기 백성들이 죽였습니다.

우리가 십자가의 죽음만을 보게 될 때, 죽음만을 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죄없으신 분의 희생으로 그의 죽음으로 내 죄가 사하여졌다는 속죄, 대속의 죽음! 그렇죠. 우리가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할수 없고, 죄의 굴레에서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을 위한 하나님의 아들의 희생. 그 고귀한 희생. 죽음. 그러나 단순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위해서 오셨다. 죽으러 오신 분이 순종하셔서 죽으셨다. 그속에 말할수 없는 육체의 고통이 있었구나 안타깝고 눈물을 흘립니다. 그러나 이렇게만 바라볼 때 죽임이 가려지고, 십자가에 달리시기까지의 우리의 죄가 가려지고, 주님의 깊은 사랑이 가려집니다. 그럼 유다의 배반은 잘된 것인가? 유다가 배반하지 않았으면 십자가에 달리시지 않으셨을 테니까. 십자가에 달아라고 외친 유대인들은 잘한 것인가? 십자가에 달리셔야 우리가 구원을 받으니까? 이런 논리가 들어가게 되면 그래서 무슨 유다를 숭배하는 이들이 나오고, 죽음이라는 결과의 단편만을 보면 십자가에 담긴 주님의 절대적인 믿음과 깊은 사랑이 가려집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복음서를 통해 철저히 죽임을 증거했습니다. 죽임당하신 거라고. 죽임당하신 어린양. 죽임이었다면 그럼 왜 예수님은 피하지 않으셨을까요? 유다가 배반할 것을 미리 아셨고 횃불을 들고 병사들이 자신을 잡으러 오시는 것을 다 아셨는데 왜 맞서 싸우시거나 피하지 않으셨을까요? 우리가 십자가에 담긴 예수님의 절대적인 믿음과 깊은 사랑에 대하여 앞으로 3주정도에 걸쳐서 집중적으로 보려고 합니다. 이 기간 십자가의 사랑에 깊이 눈뜨는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베드로는 맞서 싸울려고 했습니다. 대단한 용기입니다. 수많은 병사들앞에서 홀로 칼을 빼들고 맞서 싸우려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칼을 거두라 하십니다. 누가복음에 이것까지 참으라하시고, 마태복음에 칼을 가지는 자는 칼로 망하느니라라고 하시면서 이렇게 된 것은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라고 하십니다. 요한복음에는 칼을 칼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의 자리를 떠나는 유다를 바라보며, 이제 곧 닥칠 병사들을 예견하시면서 잡혀가시려고 다짐하고 계셨음을 알수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 말하신 선지자의 글은 무엇이며, 요한복음에서 말하신 아버지께서 주신 잔은 무엇일까요? 이것이 무엇이기에 예수님은 다 아시면서 죽임의 길을 가신 것일까요. 우리가 오늘 베드로의 설교를 본문으로 읽었으니까 베드로의 시각으로 이 문제를 풀어봅시다. 베드로는 이미 깨끗해진 자였습니다. 이미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한 자였고, 13장 이미 목욕한 자였습니다.

15:3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

즉 이미 구원받은 자였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인데 어떻게 이미 구원을 받은 것이지요? 사실 예수님의 사역동안 수많은 이들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혈루병 여인에게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맹인의 눈을 뜨이게 하시며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심지어 예수님이 중풍병자를 치유하시며 너의 죄가 사하여졌다, 즉 죄를 사할 권세도 있으셨습니다. 병든 자들이 치유되고, 죽은 자들이 살아나는 이적들이 모두 구원받은 이들이라 할수 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인데 이들은 어떻게 구원을 받은 것입니까.
9:12~13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시고 아버지와 절대적으로 하나되셨던 예수님이 증거하신 하나님은 죄인들의 죄로 인한 죄책과 고통, 그 고통이 자신의 죄로 인한 마땅한 고통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싸매시기 원하시고 용서하길 원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임을 증거하셨습니다. 마치 죄를 지어 불안에 떨고 있는 아이에게 괜찮아 걱정하지마라고 죄를 가려주시는 그런 인자한 사랑의 아버지. 죄로 인해 막힌 담을 헐고 다시 사랑의 관계를 맺길 원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우리의 죄가 무엇으로 사함받습니까. 예배를 통해서, 율법을 잘 지킴으로, 여러 신앙적인 규례를 잘 지킴으로? 아닙니다. 나의 죄를 묻지 않으시는 용서하길 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바울은 하나님의 의라고 표현했습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고 부끄러워 숨어있을 때 아담을 찾고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 그가 사랑을 믿고 회개하여 나아왔더라면죄인을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셨던 예수님이셨고 그래서 늘 죄인들의 친구셨습니다. 자신들이 죄인임을 아는 자들에게 이 하나님의 사랑은 감동이 되어 구원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러나 이 한량없는 값없는 은총이 하나님을 잘 믿고 있는, 자신들은 의인이라고 하는 이스라엘백성들에게는 걸림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율법 잘 지키고 이렇게 열심히 제사드렸는데, 우리와 저 죄인들이 같다는 것이 말이되냐. 저 죄인들을 용서한다면 불공평한 하나님이 아니냐. 이러한 유대인들, 당시 유대인들이지만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 자들, 크리스천으로 바꿔 볼수 있습니다. 믿는 자들안에 있는 이렇듯 자신을 의롭게 여기는 이 마음, 이것을 예수님은 외식하는 신앙이라고 하셨습니다. 경건한다하는 자들안에 있는 불경건함입니다.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를 기억할 것입니다. 자신을 의롭다 여기는 자신은 많은 공로가 있고 하나님께 받을 것이 많다고 하는바리새인보다, 가슴을 치며 죄를 자복하는 세리가 더 의롭다고 하셨습니다. 믿는 사람은 믿는 사람대로, 믿지 않는 사람은 믿지 않는 사람대로 모두가 다 죄인이 아닌가. 하나님의 법을 열심히 지킨다고 과연 의인이라고 할수 있는가. 하나님의 백성의 이름으로 짓는 죄가 오히려 더 큰 죄가 되는 것이 아닌가. 믿는 자들이 진실된 눈으로 자신을 겸손하게 바라보지 못할 때, 한량없이 내리는 은총은 불공평한 것이고 하나님을 불의하다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끝내 예수님을 죽이려 합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그런데 왜 죽임인 것을 다아시는데 피하지 않고 가시는 것인가. 시기와질투, 미움으로 범벅된 죽임인 것을 아시는데 왜 피하지 않으시는가. 그들을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들의 율법적인 사고가 하나님의 한량없는 은혜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값없이 용서해 주시는 그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불의하신거 아니냐고. 어떻게 그냥 용서해주냐고. 사함을 받기 위해서는 죽임이, 피흘림이 있어야 한다는 율법적인 사고. 그래, 그러나 이렇게 하면 하나님이 불의하시지 않지. 그래 이렇게 하면 이제 하나님의 사랑 받아들일수 있지. 너희의 율법적인 양심에 문제없이 하나님의 사랑 받아들일수 있지. 살기어린 죽임앞에, 예수님은 그 죽임을 하나님의 백성들이 또한 율법적인 사고를 가진 모든 이들이 복음을 받아들일수 있는 길로 받아들이셨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말씀하신 선지자의 글은 무엇일까요.

53:3~7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깍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이스라엘백성들이 가장 위대하게 생각하는 대예언자, 이사야의 예언에 담긴 고난받는 종에 대한 예언입니다. 너희에게 이 예언이 있지 않느냐. 내가 이 예언을 따라 가니, 이 모든 것이 너희의 나를 향한 죽임이 하나님의 예정임을 믿고 그의 사랑을 받아들이라. 예정이라는 말안에 하나님을 향한 절대믿음이 담겨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모든 죽임이 이러한 참혹한 상황이 하나님이 주신 잔으로 받아들이셨습니다. 철저한 버림의 자리이고 죽임의 자리이지만, 하나님이 주신 잔이라 절대적으로 믿으시고, 하나님을 향한 조금의 원망도 없이 조금의 어두움도 없이 한알의 밀알이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진리를 따라 부활에 대한 생명의 부활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으로 그길을 가셨습니다. 베드로는 뒤늦게 깨닫습니다. 주님이 이 마음으로 가신거구나. 그토록 사랑하신거구나. 또한 그토록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믿으셨구나. 그리고 그 믿음을 따라 부활의 아침이 오게됩니다.

바울은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이 화목제물이 되심은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위한 것이었다고 말합니다. 무조건적인 은총이 내려올 때 하나님이 불의하시다고 말하는 자들에게, 자신이 희생 양이 되심으로 하나님을 공평한 하나님, 의로우신 하나님, 공의의 하나님으로 세우시고 그리하여 율법적인 사고를 가진 이든, 세상 모든 이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기를 원하셨던 주님의 십자가의 길입니다.

십자가에 담겨있는 깊고도 깊은 주님의 사랑과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믿음. 주님의 제자들이 바라보고 그들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던 십자가의 의미를, 죽음뿐 아니라 죽임을 묵상함으로 오늘날 다시금 그 의미를 온전히 깨달아 변화되는 우리가 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