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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두렵도다 이곳이여
 글쓴이 : 에베소
 

두렵도다 이곳이여

28:10-22

오늘 야곱이 벧엘에서 꿈을 꾸는 장면을 읽었습니다. 이 장면은 야곱이 이삭의 축복을 받고 에서의 죽이려하는 살기어린 낯을 피해 하갈을 향해 가는 도중 광야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우리가 익히 들어 알고 있는 벧엘의 자리는 본문의 말씀처럼 황량한 광야입니다. 벧엘이 그 이후에 유명한 성소화되어 수많은 기념비가 세워졌지만 그 전의 모습은 그야말로 황량한 광야이며 아무것도 아닌 자리였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광야의 한 지점을 지나다가 날이 저물어졌습니다. 해가 지게 되었다고 쓰여져 있습니다.

 

이 말씀은 방랑자 야곱에 대한 것입니다. 그는 쫒기는 사람이고 매우 괴로운 삶이었습니다. 외로운 방랑자의 모습 그러나 이런 방랑자였던 그가 경험했던 신기한 어떤 체험, 놀라운 세계가 열렸던 그러한 거룩한 자리, 그것에 대해 기록해 놓았습니다. 여러분들의 지금의 삶은 어떤 삶입니까?  혹시 야곱과 같이 몰리고 쫒기듯 외로운 자리에 있지 않습니까? 그내용은 다르다 할지라도 야곱이 겪은 것과 똑같은 모습은 아닐지라도 이런 동일한 경험 광야가운데 홀로 있는 경험. 이런일 저런일에 쫒기고 몰려서 홀로 서있는 것 같은 경험을 한적은 없는가, 그렇게 살아가지는 않습니까? 우리의 모습은 어쩌면 야곱과 같은 모습일지도 모릅니다. 쫒기고 광야에서 자고 있는 모습일지 모릅니다. 분명 축복을 받았는데 그러나 방랑자 야곱의 모습을 보십시요 우리의 모습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야곱안의 곤고함이 우리안에도 있는 것입니다. 이게 어쩌면 축복을 받은 자의 현실입니다. 축복받은 자 앞에 열려진 길이 영광스럽고 수많은 천군천사의 옹호가운데서 안락하고 영화스러운 미래가 곧바로 열리는 것은 아닙니다. 축복을 받았지만 중요한 자리에 있었던 야곱이었지만 그가 마주한 현실이라는 것은 이렇게 쓸쓸하고 곤고했습니다. 이렇게 힘들었습니다. 쫒기고 있었고 철저히 외로운 상황입니다. 아무도 그 주변에 없었습니다. 혼자가는 것이었고 아무도 도와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복받은 자가 마주서 있는 이 현실을 보십시오. 우리의 신앙의 길을 갈 때 복만을 꿈꾸고 이것을 누리기 원한다면 그래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자가 이런 곤고하고 고독한 삶에서 쉽게 절망하고 주저 앉으면 되겠는가. 이 중요한 한 인물의 일 생의 장면을 봅시다. 그가 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복받은 자의 출발의 자리가 어떠한가. 처음은 이러했습니다.   알다시피 창35:7 에서 하나님의 만남과 약속과  이 모든 것이 다 성취 되었던 야곱의 일생을  다시 만나게 될수 있습니다.

 

자 야곱의 이 처음 축복받은 모습을 봅시다. 그런데 야곱안에 문제는 무엇이며 흘륭한 점은 무엇일까? 오늘은 이것을 잘 붙들기를 바랍니다. 축복을 받은자가 축복을 축복으로 알지 못했을 때 곤란합니다. 야곱이 정말 흘륭한 사람입니다. 왜 일찍 정신을 차렸기 때문입니다.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내가 정신이 멀쩡한데 무슨 정신을 차리라는 것인가. 보통 사람은 대개 한동안 고생하고 나서야 정신을 차리게 됩니다.“아 이런거였구나” 그때 깨달음이 옵니다. 열립니다. 오늘 말씀에 다른 제목을 붙이면“하늘문이 열림”입니다. 열리고 난 후에 보면 이미 늦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정말 축복받은 자입니다. 하나님의 선행적 은총으로 말미암아 일찍 이것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1:51을 보면 나다니엘을 부르실 때“또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하셨습니다. 제자들을 부르실 때 이런 세계를 보리라 하셨고 또 볼것을 원하셨던 것입니다. 꿈의 진정한 의미를 축복의 진정한 의미를 보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주는 진정한 의미를 깨닫기 바랍니다. 우리신앙이 어디서 열리는가. 한단계 발전하게 되는가. 진정한 꿈을 깨닫고 꿈안의 꿈을 내가 알게 될 때 멋있는 세계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꿈을 주십니다. 소망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대개 힘든 과정 가운데서 좌절합니다. 나의 능력으로 좌절하고 어려운 현실진정한에서 좌절합니다. 꿈을 깨닫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야곱은 아주 진지한 체험을 했습니다. 이 꿈이 어떤 꿈인가. 방랑자 야곱이 광야를 가는데 해가 저물고 한돌을 취해 거기에 누워잡니다. 그런데 꿈을 꾸었습니다. 그 꿈에 자기 삶의 모든게 담겨져 있었습니다.

 

28:12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서 있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고
사닥다리 꼭대기에 하나님이 계셨고 하나님의 사자가 오르락 내리락 하더라고 했습니다. 사닥다리의 꼭대기에는 하나님께서 계셨고 끝은 땅에 닿았는데 사자들이 오르락 내리락 했습니다. 그 자리는 지금 야곱이 자고 있는 외로운 광야에서 꿈을 꾸고 있는 자리였습니다. 야곱의 자는 곳에 수직적인 사닥다리가 놓여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8:13~15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야곱이 잠에서 깨어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28:16 가로되 내가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신앙에서 벧엘의 체험이 너무나 중요합니다. 엠마오의 제자들이 어떻게 주님을 만났습니까. 동행하는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를 아는 체험을 누가는 성령의 감화를 받아 감동적으로 적어 놓았습니다. 지금 야곱이 그렇습니다. 야곱안의 깨달음은 무엇입니까. 아 과연 여기 계시는 구나. 그런데 내가 알지 못했구나. 이 깨달음입니다. 여러분 어떤 세계가 열릴 때 우리가 진정으로 나의 사명을 깨닫게 됩니까. 수평적인 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상적인 일이 아닙니다. 잘들어 있는 야곱의 누운 모습이나 돌베게의 모습과도 같은 그런 깊은 잠, 그런 세상적인 관계속에 살아가는 그런 모습이 아닙니다. 야곱의 삶과 야곱의 자리라는 것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세상에 휩쓸려가는 똑같은 삶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을 잇는 사닥다리입니다. 사닥다리는 이어주는 자입니다. 그게 나의 길이고 그것은 하나님께 이르는 사닥다리입니다. 사닥다리가 누워 있는 내 가슴에 와있습니다. 저 높은 곳에 하나님이 계신데 하나님께로 이르는 문이 츨발의 자리가 내게 있다는 것입니다.

 

옛사람들이 물음이 있었습니다. 삼층천 저높은 곳에 하나님이 계신다고 보았습니다. 도대체 저곳으로 오를 수 있는 문은 어디 인가라는 물음이 있었습니다. 야곱의 꿈가운데 이 시대 사람들이 가진 깊은 역사적 물음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우리는 하늘로 이를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집트의 큰 피라미드에 들어가보면 그것은 파라오의 무덤인데 백성을 통해 그것을 쌓게 했습니다. 돌을 하나하나 쌓아 올렸습니다. 그 꼭대기에 무엇을 두었냐면 신기하게도 배를 갖다놓았습니다. 피라미드는 삼각형으로 되어있는데 인생이 그렇습니다. 시간이 지나는 모습인데 아기는 시간이 많으므로 그 밑이 크고 넓습니다. 긴 시간 안에서 그가 발을 구르고 놀기도하며 그렇게 인생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점점살아가는게 아니라 죽어가는 것이죠? 결국은 한줌의 흙이 되어 사라지듯이.. 올라갈수록 좁아지고 시간의 끝이 오는 것입니다. 그때 세상의 모든 영화로움을 맛보았던 왕이요, 저 영원한 하늘로 갈수 있는 길이 없겠는가. 그래 무한한 세계를 향해 배를 저어 강을 건너 먼 피안의 세계로 들어가면 되겠구나. 고대 근동의 모든 사람들의 꿈, 즉 야곱의 시대 고대 사람들의 꿈은 저 하늘의 문을 어떻게 열고 그 하늘로 오를 수 있겠는가. 이것이었습니다. 그리할수만 있다면. 그런데 야곱이 깨달은 것은 야곱이 꾸었던 꿈은 무엇인가. 17절 “두려워하여 가로되..” 그 하늘로 이르는 문이 바로 여기 내가 누워 있는 곳이. 바로 내가 그 문이구나. 그 자리가 하나님의 전이오 이는 하나님의 문이로다 이 말입니다. 루스는 무엇이냐면 초라한 한 나무에 불과 했던 이름입니다. 그런데 벧엘은 하나님의 집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집은 전입니다. 누가? 내가 이자리가 내가 있는 이 자리가. 내 자신이 누구인가. 초라한 광야에 서있는 한 나무에 불과한가? 아니다 이것입니다. 신앙의 길은 이것을 깨닫는 것이 정말 중요합니다. 내가 누구인가.

 

세상에 많은 종교가 있습니다. 수많은 이름의 신들이 있습니다. 오늘날 스스로 지혜있다하는 인간의 지혜로 인간이 바로 설수 있다고 믿는, 인간의 지혜로 내가 누구인지 알수 있다고 하는 이들은 종교는 인간의 나약함의 산물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신을 믿는 인간을 나약한 존재로, 구시대적인 세련되지 못한 인간으로 취급할지 모릅니다. 가만히 보면, 그들은 어떤면에서 보면 더 종교에 심취한 자들인지 모릅니다. 어떠한 종교인가. 지식, 인본주의. 인본주의의 산물을 믿고 있는거죠. 인간은요, 내가 누구인가. 근본적으로 나에 대한 궁극적인 갈망이 있어요. 이 갈망은 깊고도 깊어서 어떠한 해답이라도 붙들고 가야했는지 몰라요. 오늘의 현대인들 또한 모양은 다르지만, 분명 신은 아니라고 하는데 스스로 지혜있다하나 어리석게 되었다고. 자기가 믿고 싶은걸 믿고 가는거에요.

 

20대초에 즐겨보던 TV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사회이슈나 정부의 정책에 대해서 찬반의 의견, 양쪽의 의견을 대표하는사람들이 나와서 자신의 주장을 갖고 토론하는 프로그램이었는데, 너무 재미있었어요. 내용이 딱딱하고 지루해서 사람들이 잘 안보는데 저는 너무 재미있었어요. 무엇이 재미있었냐면, 어느 한쪽이 주장을 펼쳐요. 그러면 아 이사람 말이 정말 맞네. 그러다가 다른 반대편 쪽에서 주장을 펼쳐요. 그럼 아 저사람 말이 더 맞네. 다시 이쪽엣 반론을 재기해요. 오 그럼 이 사람말이 더 맞네. 항상 그 프로그램의 결론은 뭐였냐면 여러분의 선택은? 그러면서 생각해보는거죠. 내 판단은 뭐지. 그리고 어떤 깨달음이 오냐면 이 사람말도 일리가 있고 저 사람말도 일리가 있다. 완전히 틀린 사람은 없다, 그리고 완전한 정답도 없다. 이 세상에 과연 진리가 있을까. 세상 모든 이들이 문화와 인종과 시대를 초월해서 모든 이들이 받아들일수 있는 진리가 과연 있을까. 있을수 있을까. 사람이 만든 것이라면 그 진리라는 것은 절대 완벽할수 없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믿고 싶은 것 듣고 싶은 것을 따라서 가요. 그쪽 말만 계속 듣고 가요. 그럼 그게 맞다고 정의내리고 그냥 가는거에요. 사람이 이렇게 약해요.

 

그런데 내안에 있는 이 갈망, 내가 누구인가. 존재의 궁극적인 근원에 대한 어떤 삶이 가치로운 삶인가에 대한 진리에 대한 갈망 이 마음을 어떡할것인가. 영원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언어는 존재를 담는 그릇이라고 했는데, 영원이라는 개념이 어디서 왔을까. 인간 자체가 영원하지 않아요.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나도 이 세상도 이 지구도 심지어 우주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영원이라는 개념을 알까요. 영원히 사랑해, 우리 우정 영원할꺼야. 영원. 어항에 있는 물고기가 있다고 합시다. 이 물고기는 어항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이 물고기는 바다에 대해서 알수 없죠. 바다라는 개념 자체를 모를거에요. 끝이 없이 펼처진 어항. 고래가 있고.. 상상조차 할수 없죠. 이 물고기는. 수족관에서만 나고 자랐으니까. 그런데 물고기안에 대양을 향한 알수없는 갈망이 있다면 그럼 바다가 있는거에요. 인간은 영원을 말해요. 영원한 것을 갈망해요. 그렇다면 영원한 것이 있는거에요. 성경은요 이리보고 저리보고 이렇게 따져보고 저렇게 따져봐도 정말 완벽한 진리입니다. 비판적인 사고를 가질 때 우리는 더큰 확신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비판하려면 제대로 비판해야되고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려고 하면 안됩니다. 인간은 그렇게 약해요.

 

내가 누구인가. 신앙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이것을 감히 알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유한자가 무한자를 어떻게 알겠습니까. 신앙의 궁극적 목적은 그 분이 열어주시는 계시로 말미암아 결국은 나를 발견하고 나를 아는 것입니다. 나를 아는 것 위대한 철인이었던 소크라테스는 별의 별 학문을 다 해보아도 알고보니 결국은 나 하나를 아는 것 “너 자신을 알라..” 이것이 중요한것이다 라고 이야기 했다는 것입니다. 최고의 철학의 대가가. 신앙의 결론도 들어가다보면 그것입니다. 내가 누구냐. 자기의 위치에 대한 것입니다. 이걸 잃어버리면 인생은 표류하게 되고 산다해도 사는 것 같지 않습니다. 말씀은 대단한 것을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본래의 나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타락은 무엇인가? 비본래적인 나입니다. 본래적인 내가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소외입니다. 이런 내가 아닌데 그럼으로 말미암아 인생이 곤고합니다. 그렇게 살아야하지만 내가 그렇게 사니 곤고한 것입니다. 기차가 철길로 달리면 힘들지 않을 텐데 그것을 이탈했다면 인생이 곤고해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내 자신이 찾는 것입니다.

 

지금야곱안의 행복한 놀라운 세계를 보십시오. 꿈을 꾸게 됨으로서 이 세계를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꿈을 꿉니다. 하나님 말씀은 꿈을 가져다 줍니다. 신앙이라는 것이 뚜렷한 세계에서 몽롱한 세계로 빠져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완벽하게 뚜렷하게 해주는 것이 성경입니다. 그꿈은 우리에게 새로운 세계와 밝은 미래를 열어준다는 것입니다. 내 인생의 자리가 어떤 것인가. 어떻게 살아야하는가. 이것을 가르쳐 준다는 것입니다. 결국은 나의자리 내삶의 자리를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나를 깨닫게 됩니다. 그럼으로 인생이 힘이 있게 됩니다.

 

지금 봅시다. 야곱은 누워있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깨어 일어 났습니다. 아 여기구나. 하나님께서는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구나. 아버지의 하나님, 할아버지의 하나님만 들어서 알았는데 이제 깨달았습니다. 이제 나의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그냥 그렇게 살았던 물과 같은 인생이었는데 이것이 전환이 온 것입니다. 깨어나서 수직적인 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돌은 누워있거든요 야곱이 돌을 세원 이유는 그돌이 매우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죠. 야곱이 깨어보니 너는 왜 이렇게 누워 있느냐? 이전의 내모습과 같구나. 기름을 부은자라는 것은 기름은 영원을 상징합니다. 영원히 서있을 자라는 것입니다. 내가 영원히 누워서 잠을 잘 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워지신 그리스도와 같습니다.

 

야곱처럼 이런 행복한 사람, 위대한 꿈을 꾸길 원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통해 이런 꿈을 꾸고 깨닫기 바랍니다. 그꿈을 통해서 열려질 세계란 무엇인가? 나를 찾는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께서 여기 계심을 내가 알지 못했노라. 하나님께서 여기 계셨구나 정말 이것을 알면 잠을 못잡니다. 잠이 싹 달아납니다. 말씀을 제대로 깨달으면 처음 오는 것은 잠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영의 사람은 잠이 사라집니다. 불면증 환자가 된다는 것이 아니고 이렇게 침륜에 빠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나를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나는 정말 알고 가는가? 야곱은 형님의 장자의 권한을 받았는데 그 축복을 받은데서 진정한 의미를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복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는 거에요. 아 이런 복이구나 하고 의미를 알아야합니다. 여러분들도 복을 받았는데 그 복의 진정한 의미를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야곱처럼 꿈을 통해서 내안의 귀한 것을 보아야합니다. 야곱이 너무 훌륭합니다. 주신 이 꿈을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13절 부터는 축복입니다. 여러분은 누구입니까? 하나님 축복은 믿는 자들안에 이렇게 한결같이 오늘 이 시대에 이 믿음을 가진자에게 동일하게 내려옵니다. 여러분이 만나고 찾아왔던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나타나셨던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이 약속을 던지시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의 선조들을 지켰던 열조들에게 나타났던 그 하나님이니라. “내가 너의 후손을 편만케 하며 충만케 하며 영화롭게 하며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 하나님이 항상 너희와 함께 계신다는 뜻입니다. 이 한마디만 잃어버리지 않아도.. 꿈속에서 엄청난 축복을 받았던 야곱이 꿈을 깨고 나서 붙들었고 포착했고 움켜주었던 단 하나의 인상은 무엇일까?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라는 것입니다. 임마누엘 입니다. 야곱은 이 한마디를 평생토록 놓치지 않았습니다. 어떤 역경과 환란과 이십년의 고역살이 종살이 속에서도 여러운 타향살이인데도 외로운 타향의 종살이 속에서도 그가 좌절하지 않았던 단 하나의 희망 원천 흔들리지 않는 기준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무엇을 느낍니까? 지적인 만족을 하는것입니까? 그럴수도 있죠. 그러나 하나를 깨달으면 됩니다. 진정한 축복은 무엇인가?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것만 잊지 않으면 멋있는 세계를 그 약속을 이룰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대개 놓치는 것인데 야곱은 이것을 움켜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옷자락을 붙들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옷자락을 붙들고 보니 이렇게 가까운 곳에 하나님이 늘 계시단 말인가? 하고 생각했습니다. 말씀은 우리에게 두려움을 가져다 줍니다. 말씀을 들으면 들을수록 무엇을 갖게 됩니까? 하나님과 가까워가고 옷자락을 만지는 순간 우리안에 체험하는 경험은 다가오는 세계는 두려움입니다.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나이다. 두려워하여 가로되 두렵도다 이곳이여 이것입니다. 여러분의 자리가 다 두려움의 자리입니다. 이게 야곱처럼 이런 꿈을 통해 우리의 삶에서 아주 일상적이고 평번한 삶이었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셨던, 그것을 진정 깨닫는 순간 두렵도다 이곳이여.

 

어떤때 우리가 아무렇게나 살게 됩니까? 우리에게 준 사명의 소중함과 그 가치를 잃어버릴 때 입니다. 보지 못할 때 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야곱처럼 벧엘의 꿈을 꾸는 자들 말씀을 통해서 사명과 자리를 알아야합니다. 늘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늘 기억하고 여러분의 자리가 얼마나 소중함을 알고 가야합니다.

18절에 야곱은 아침일찍 일어났습니다. 침륜에 빠지고 세상에 어울렸던 모습이 아니라 사명과 자리를 알고 깨어난것입니다. 벧엘이 누워서 잔곳의 원래 이름은 루스인데, 루스는 한나무라는 뜻입니다.그러나 그것이 아니고 여기가 벧엘 하나님의 집이요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이 하늘로 오르는 길은 없습니다. 유한자가 무한자에게 가는길이 없습니다. 그분과 우리사이에는 말할수 없는 깊은 계곡이 있습니다. 누구도 그곳을 건널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여러분을 택한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하나님의 문이로구나 . 나로 말미암아 이땅의 모든 곤고한 인생이 하늘로 오를 수 있는 그 길이구나. 이미 하늘의 천사가 오리락 내리락 자유롭게 다닐수 있는 그 문이 바로 나구나 이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통해서 이 세상에 그 모든 소원과 그 뜻과 모든 일들을 이땅 가운데 내려와서 하시고 바로 내가 그 문입니다. 이 땅에서 모든 사람은 다 나를 통해서 집도 마찬가지고 여러분 한사람이 들어오면 다 그 사닥다리를 통해서 올라갑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우리안에 무엇을 줍니까? 꿈을 주셨습니다. 귀한 자리에 세웠습니다. 돌을 세웠습니다.

28:20~22 야곱이 서원하여 이르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어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

 

야곱의 기도가 매우 조건적인 것 같고 매우 물질적 육적인 것 같지만 가만히 보면 너무 멋있습니다. 야곱이 이런 자세이기 때문에 하란의 종살이 20년의 고난의 여정을 살아남을수 있었습니다. 이 기도 속에서 그가 살아남을수 있었던 힘과 인생관이 있습니다. 이런 기도를 할수 있어야합니다. 야곱이 엄청난 재산을 모아서 다 형에게 줄수 있었던 것은 이런 자세 이런 신앙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갈 때 내가 세끼 먹을 것 몸에 걸칠 두벌 옷만 주신다면 나를 평안히 아비의 집, 이것은 오늘의 시대에서 보면 본향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 세계에 이르게 해주신다면.. .이게 중요한 기도입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시옵소서 그 나라에 이르기까지 걸어가는 인생의 자세는 그저 이것인 것입니다. 야곱이 자기 일생을 걸고 하는 기도가 겨우 이것입니다. 좀더 크고 화려한 것을 하지 않고… 어떤 사람은 야곱은 이 기도를 약한 기도라고 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기도는 자세히보면 멋있는 기도입니다.

 

그저 내게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무화과 나뭇잎 없어도 좋다는 것입니다. 없으면 어떻습니까? 이미 이 안에 임마누엘이 있습니다. 야곱안에 있는 그 놀라운 약속과 꿈을 기억하고 사는 자세 “그저 주께서 나와 함께 있으시니 내가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라는 자세 바로 이것입니다. 그저 굶지 않을 먹을 양식과 옷을 주시면 그리고 그저 하늘에 들어갈수 있는 길 열어 주시면 내 인생을 당신께 바치겠다는 것입니다. 내인생의 모든 것이 당신의 인생이 되고 당신을 위한 삶이 될 것이고 내가 받은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언제나 드리리다. 너무도 진솔합니다. 감정적으로 허황된 기도 다 드리겠다고 하고 십분의 일도 드리지 않는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십분의 일은 꼭 드리리라 하고 작은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모든 것을 드렸습니다. 우리가 무엇이 필요합니까? 이런 기도입니다. 옷장이 넘치는 옷들과 풍족한 산해진미가 아니더라도. 무화가 나무가 마르고 열매가 없어도 난 여호와로 인해 즐거워하리..이런 마음을 갖고 살았던 야곱 이게 풍류입니다. 이런 인생이 풍류입니다. 성령의 사람, 성령 바람과 같다고 했습니다. 바람같이 메이지 않고 이것만이면 족하다는 것입니다. 이게 고난의 여정 20년을 이길수 있었던 위대한 야곱의 이스라엘의 첫조상이 되었던 야곱의 모습입니다. 이 세계를 따라사는 우리 모두가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