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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하나님의 형상대로
 글쓴이 : 에베소
 

하나님의 형상대로

1: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구절이죠. 이번주 이 구절이 계속 가슴속에 남았습니다.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성경은 특히 창세기는 굉장히 압축적이고 상징적인 언어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짧은 구절안에 깊은 메시지가 담겨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사람안에 하나님의 형상이 있다는 것입니다. 고후4:7 우리가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인간은 참으로 깨어지기 쉬운 질그릇과 같은 존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값진 보화를 넣어주신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간을 만드셨다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을 닮았다는 것입니다.
5:1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떄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하나님의 모양대로여기서는 likeness 닮은 모양이라는 뜻입니다. 닮았다는 것입니다.
5:3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가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아담이 아들을 낳는 장면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자기 모양과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간을 지으셨다는 것은 마치 자녀가 부모를 닮은 것과 같은 의미라는 거죠. 자녀안에 부모가 투영되어 있듯이. 인간이 하나님을 닮았습니다. 인간을 가장 가치롭게 설명할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요? 인간이 하나님을 닮았다는 말은 인간을 설명할수 있는 방법중 최고의 가치로운 설명일 것입니다. 한명한명이 다 하나님을 닮았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그 자체로귀하고 가치로운 존재라는 입니다.

인간의 존엄성은 어디에서 올까요. 다른 동물들보다 똑똑하다는 것에서 올까요, 이성을 가졌다는 것, 아이큐가 높다는 것에서 오지 않습니다. 이러한 설명들은 오히려 인간의 가치를 떨어뜨릴수 있습니다. 그뿐아니라 또다른 차별을 만들어내는 설명일 수 있어요. 인간을 고귀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을 닮은 존재라는 겁니다. 모든 인간은 외모, 성격, 인종 국적을 불문하고 다 소중합니다. ? 인권의 기초가 뭐냐. 인간존엄성은 왜 있어야 하는가. 하여간 인간은 귀해왜죠? 왜 인간은 존엄한거죠? 논리적으로 고상한 언어로 설명을 해내지 못할 뿐이지, 인간은 그 자체로 존엄하다고 모두 생각합니다. 성경은 이것을 완벽하게 설명하고 있어요. 구체적으로 풀어보면 하나님을 닮았기 때문에. 이 세상을 창조하신 그보다 더큰 분이 없는 분을 닮은 자녀와 같은 존재가 인간입니다.

세상이 만든 인간의 가치는 조건적이고 상대적입니다. 능력의 유무, 돈의 유무, 성격의 호불호, 존엄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존귀히 여기지 않습니다. 사실은 차별합니다. 모두가 존엄할수 없는 사회의 구조를 만들어 놓고 살아갑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을 존귀히 여깁니까. ‘라는 존재에서 자연스레 뿜어져나오는 가치로움이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가치에 나를 맞추려하기에 우리는 늘 가치를 쫓아서 살아야하고 비교우위에 서려 발버둥치는거죠. 혹은 내가 만들어놓은 가치에 나를 맞추려 안간힘을 하며 발버등하는지도 모릅니다. 이것이 가치로운 삶이야하는 그런 기준 말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다! 모든 인간은 그 자체로 우주적 존재이고 그러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왜냐, 하나님의 형상이기때문에. 모두가 우위를 따질 것 없이 다 귀한 존재인 것입니다.

인간이 가장 괴로울때는 내가 너무 쓸모없는 존재라고 느낄 때, 내가 필요없는 사람, 그 누구도 세상도 나를 필요로하지 않는 것 같을 때, 존재의 가벼움이 주는 참을수 없는 괴로움이 있습니다. 내가 사라진다고 세상이 눈하나 꿈뻑하지 않을거 같은데. 두사람정도 울어줄까. 그것도 곧 잊혀지겠지. 우리의 열심을 가만히 보면 사실 내가 필요한 존재가 되기위해 인정받기 위해 경쟁하고 노력하는지 모릅니다. 혹은 나의 가치를 위해 자신을 어떠한 기준에 맞추고 나를 괴롭히는지도 모릅니다. 보통 완벽주의적인 성격, 착한 사람증후군에 속한 사람들이 그러한 기준을 많이 만들어 놓고 살아요. 자신을 채찍질하며 나의 가치를 만들어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많은 관계성속에서 많은 스팩들 속에서 말이에요. 너는 어떤 아파트사니, 너는 어떤 옷을 입니, 너는 얼마나 착하니. 비교속에서 자신의 가치와 필요성을 찾아가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사실 그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인간의 가치는 어떠한 비교우위에서 오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세상의 기준이 어떠하든 우리는 모두가 하나님의 형상입니다그 자체로 빛이나는 존귀한 존재입니다.

5만원짜리 지폐에는 신사임당의 그림이 새겨져있죠? 이 그림이 새겨져 있어야 5만원의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다른 그림이 새겨져 있으면 그건 그냥 종이조각인 것이죠. 이처럼 인간 안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새겨져 있습니다. 인간 안에 하나님을 닮은 모습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우리 안에 주조되어 있고 담겨져 있습니다. 우리 안에 이 하나님의 형상이 남아있을 때 인간은 인간으로써의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인간을 인간되게 하는 것은 그 어떠한 것도 아닙니다. 이미 창조될때부터 우리에게 필연적으로 담아두신 하나님의 형상, 누구에게나 있는 이 하나님의 형상이 인간을 가치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그 존재만으로도 가치로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드러나면 그는 스스로 자신의 가치를 느끼게되요. 하나님의 형상을 빼면 인간은 육만 남아요. 흙이에요. 사라지는 허무한 존재. 6저들이 육체가 됨이라육이되면 우리는 스스로 괴로움을 느끼게 되고 다른 가치들을 쫓게 됩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나를 가치롭게 만드는 것입니다.

부모는 아이를 낳은 후에 반드시 자신과 닮은 모습을 아이에게서 찾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아이는 반드시 부모를 닮게 되어 있습니다. 생명은 이렇게 닮게끔 창조되었습니다. 부모는 자신을 닮은 자녀를 위해서 희생하는데 아까워하지 않습니다. 부모가 열심히 일합니다. 쉬고싶지만 아픈 몸 이끌고 일하고 상사의 잔소리들으면서 꾹 참고 그렇게 희생한 것을 자녀에게 주는데 아까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못줘서 미안해해요. 신기한 마음이죠. 그걸 남의 자식에게 그렇게 쓴다면 아까워할지 몰라요. 그런데 자신의 자녀는 아깝지 않아요. 그리고 자녀를 위해서 손과 발이 닳도록 수고하고 귀하게 키워냅니다. 부모는 자식이 나를 닮았다는 말에 가장 기뻐합니다. 왜 그러는 걸가요? 부모는 자식에게 왜 그러는 거죠? 부모와 자식의 특별한 끈은 어디서 오는 걸까요? 닮았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단순히 내 자녀가 내 외모를 닮았다는 이유로 우리는 그토록 희생합니까. 아니에요. 아무리 더 예쁘고 더 잘생기고 더 능력많은 아이들이 있어도 내 아이에게 특별히 끌리는 마음, 짠하다고 하잖아요. 이 짠한 마음이 무엇이라 정확하게 설명해내기는 어렵지만, 희생하면 오히려 기쁘고 심지어 생명까지도 줄수 있을 것 같다. 옆집 아이에게 내 심장주기는 어렵지만, 내 아이가 필요하다면 고민하지 않잖아요. 이성적으로 설명할수 없는 이 끌림이 뭘까. 이건 분명히 이성을 뛰어 넘은 세계입니다. 사실 이것이 우리의 삶을 이끌어 가고 있습니다. 이 마음을 우리는 담백하게 이렇게 표현해요. 무엇이라 정확하게 표현할수 없지만, 어디서 온 마음인지는 모르겠지만. 내 자식이라고. 날 닮은 내 자식이라고. 그죠. 더 설명이 필요없어요. 이 말에 다 담겨져 있어요. 단순히 외모가 닮아서? 성격이 닮아서 일까요? 아니에요. 외모 성격 닮지 않아도 내 모든 것을 다 줄수 있는 특별한 끌림. 이걸 유전학적으로 설명할려고 한다면 오히려 훼손된 설명이 될수 있어요. 지식과 이성으로 다 설명해 낼수가 없는 거에요. 이성적인게 아니에요. 다르게 표현하면 이렇게 표현할수 있어요. 내 안에 너가 있는거죠. 너 안에 내가 있는 거라고. 보이지 않는 특별한 끈이 있어요.

하나님의 형상으로 사람을 지으시고이 구절이 간단한 구절이 아닙니다. 그냥 쉽게 읽고 넘어갈수 있는 구절이 아닙니다. ‘2:7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십니다. 남의 자식이 아니고, 내 자식이라고요. 예수님이 말씀하시죠. 하나님은 내 아버지라고. 또한, 하나님이 너희의 아버지이시라고. 유대인들은 돌을 던지려 했습니다. 어찌 감히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느냐고. 예수님은 아버지의 시대를 열기 위해 오신 분입니다. 막힌 담을 허시기 위해 오신 분입니다. 하나님이 창조주이신 것은 알겠는데, 왜 내 아버지이시죠? 나를 낳았기 때문에요? 나를 만드셨기 때문에요? 아니에요. 창조주와 아버지는 전혀 다른 의미에요. 피조물을 넘어 나를 자녀라고 하시고 자신을 아버지라고 하세요. . 왜 그렇게 말하실까요? 창세기는 한마디로 이렇게 표현해요. 너희가 하나님의 형상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닮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닮았다는 말속에 다 담겨져있어요. 내 닮은 내 자식이라고. 이 말에 너와 나의 관계의 모든 것이 다 담겨져있고 뭐 더 설명할 말이 없어요. 아버지와 자식사이에 이보다 더 완벽한 설명이 있습니까. 내 자식이라고. 자식을 향한 특별한 끌림을 이 짠한마음을 표현할 유일한 설명은 이거에요. 내 자식이라고. 조금더 풀어보면 이런 표현이에요. 목숨까지 아깝지 않은 특별한 관계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표현속의 의미를 제대로 알면, 성경이 다 해석됩니다. 역사가 해석되고 예수님이 왜 십자가를 지셨는지 다 해석됩니다. 하나님은 저 멀리 거룩한 곳에 거룩한 성전에 계시고, 나는 이 험난한 세상에 있는 것입니까. 어거스틴이 하나님은 이미 내 안에 계셨다고. 내가 비로소 눈을 떠보니 이미 내안에 계셨음을 고백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을 닮았습니다. 자녀가 부모를 닮는 것처럼. 그로인해 특별한 끝으로 연결되어듯이. 하나님과 우리는 닮은 존재로 특별한 끈으로 연결된 존재에요. 하나님께서는 부모가 자녀를 자신의 생명을 다해서 사랑하듯이, 사실은 그보다 더 큰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형상이 있기에 이러한 사랑을 할수 있는 것입니다. 그 기록이 성경이에요. 우리가 비록 하나님앞에 고개를 들수 없는 죄가 있다 할지라도 우리를 구원하시기위해 맨발로 뛰쳐나오는 그런 아버지입니다. . 하나님이 왜 그러시나요? 닮았기 때문에. 날 닮은 내 자식이기에. 우리가 하나님을 닮았다는 것, 우리안에 하나님의 형상이 있다는 것, 창조는 지금 이 한마디에 사실 다 말한거에요. 더 설명이 필요없어요. 설명할 말이 없어요. 우리를 이렇게 저렇게 만들었다고 목적을 쭉 리스트해서 자세히 설명해 주시지.. 그런데 사실 이 한마디에 다 담겨져있는거에요. 부모가 자식을 향한 마음을 이렇게 한마디로 표현하듯이 말입니다. 날 닮은 내 자식이라고. 이 표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아이를 잃어버리면 부모는 하늘이 무너진 것 같다고 합니다. 서울에 보면 큰교차로마다 어느 한아이의 실종자를 찾는 동일한 현수막이 곳곳에 걸려있었어요. 버스타고 가다가 자주 봤는데 현수막이 떨어질만 하면 다시 새현수막이 걸리고. 서울 곳곳에 걸려있어서 주목해보지 않아도 자주 보게되었던 현수막입니다. 우연히 내용을 보니 잃어버린지 굉장히 오래됐어요. 20년쯤 된 것 같아요. 문득 드는 생각이 내 맘 안에서 과연 찾을수 있을까. 그런데 그 분이 방송에 나왔어요. 과연 누굴까 궁금해하던 차여서 신기해하며 봤는데, 20년전에 잃어버린 딸이에요. 아버지는 할아버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잃어버린 날부터 지금까지 하루도 쉬지 않고 현수막을 달고 전단지를 돌려요. 지금은 백발의 노인이 되었는데 아이 찾겠다고 재산 다 탕진하고 국가에서 주는 노인연금으로 생활하는데 그것도 현수막만드는데 다 쓰시고. 그런데 제 마음에 남았던 것은 그분의 눈빛이었습니다. 꼭 찾을수 있다고. 조금의 의심도 없는 눈빛이었어요. 꼭 찾을거라고. 어디서 어떻게 지내고 있을지. 어디서 추위에 떨고 있진 않을까. 맛있는 음식 먹는 것도 죄스럽고 주로 라면만 드시면서 할아버지가 되셨는데도 포기할수 없다고. 주변에서 얼마나 말렸겠어요. 이제 포기하시라고. 그런데 그분이 이렇게 말해요. 딸의 미소를 잊을수 없다고. 맛있는거 있으면 나먼저 챙겨주던 딸의 미소를 잊을수 없다고. 내 딸은 반드시 살아있고 꼭 찾는다고. 그걸 보면서 내 안에 어렵지 않을까 했던 마음이 깊이 회개가 되었습니다. 내 자식이 아니면 그럴수 있죠. 그러나 내 자식이면 달라지는거에요.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생각하십니다. 하나님께서요 우리안에 하나님의 형상을 왜 넣어주셨을까요. 날 닮은 내 자식이라고.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십니다. 나를 자녀로 여기시는 아버지이십니다. 하나 밖에 없는 내 자식. 세상에 똑같은 사람 아무도 없어요. 쌍둥이도 달라요. 그래서 부모가 잃어버린 자녀를 애타게 목숨을 다해서 찾으려고 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찾고 또 찾고 구원하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귀한 자들입니다. 우주와 바꿀수 없는 한사람한사람 입니다. 나의 가치는 나로부터. 내가 만드는 것으로부터. 내가 꾸민 것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액세서리 아무리 많이 단다고해서, 나의 가치가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내 안에 이미 담아두신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을 닮은 하나님의 자녀. 이 자리가 우리의 가치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자아입니다. 진짜 나 입니다. 누구의 아들, 누구의 아빠, 누구의 친구로 불리울 수 있지만, 모든 인간은 공통적인 자아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된 하나님의 자녀. 이것이 창조신앙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나 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알게 되는 인간은 어떤 존재입니까? 하나님께서 너무나 고귀하고 소중하게 여기시는 자들. 고귀하고 소중하다는 말은 누구나 할수 있습니다. TV광고에서 고객님이 최고라고. 당신을 소중하게 귀하게 모십니다. 누구나 말로 할수 있습니다. 요한사도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이처럼 사랑하셨다. 어떻게? 이처럼. 예수님의 십자가를 말하는 거에요. 예수님께서 친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큰 사랑이 없나니’(15:13) 부모가 자식을 위해 목숨 바칠수 있어요. 자식이 부모를 위해 목숨 바칠수 있어요. 그런데 친구를 위하여더군다나 그 친구들이 다 도망가고 거절하고 감사치도 않는데, 심지어 그 친구들이 나를 죽이려하는데 말입니다. 이러한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사랑, 이 사랑은 어떤 사랑인걸까요? 십자가는 사형수를 빨리 처형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죽음의 순간에 이를때까지 인간이 겪을수 있는 최고의 모멸감과 인간의 육체가 겪을수 있는 최고의 고통을 느끼면서 서서히 죽음에 이르게하는 끔찍한 사형도구였습니다. . 이렇게 사형당하고 싶지 않으면 죄를 짓지 말라 이런 의미였죠. 그런데 주님께서, 그 십자가의 길을 감사치도 않는 도망가버린 친구를 위하여여러분에게 친구가 있습니까. 이 사랑은 어떤 사랑인 걸까요. 도대체 이 사랑은 어디서 온 걸까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사도는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이러한 사랑을 가능케합니다. 우주의 시작부터 태초부터 나를 만드시리라 예정하시고 오늘날 나를 낳으신 하나님이 계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닮았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분의 자녀입니다. 그 자리가 바로 우리의 자리입니다. 이보다 더큰 사랑은 세상에 없습니다. 이보다 완전한 사랑도 세상에 없습니다. 이 모든 사랑이 나를 향한 사랑입니다. 내가 나의 자리에 서면 이 사랑이 흐르고 흘러 나와 내 가정과 내가 속한 모든 사회가 다 회복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