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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글쓴이 : 에베소
 
제목: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본문: 고후12:5-10

바울 사도 안의 매우 감동적인 고백입니다. 바울사도의 삶과 그의 신앙은 늘 우리에게 도전을 가져다 줍니다. 바울은 거침없이 복음을 들고 전진하여 기독교를 세계인의 종교가 되는데 가장 큰 공로자임에 틀림없습니다. 기독교는 진리이기에 전해지는 곳에 역사가 일어납니다. 타종교를 열심히 전한다고 해서 과연 기독교만큼 세계적인 종교가 될수 있었을까. 그렇지 않습니다. 기독교안에 있는 사랑과 자유, 이 메세지가 전해지면 영혼이 응답합니다. 가장 고상하구나.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 어떠한 차별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가르침이 전해지는 곳에는 늘 혁명이 따라왔습니다. 믿음이라는 단어안에 전적인 자유의 전제가 있기때문입니다. 우리를 속박하고 억압하는 짐을 지우는 모든 것에서 자유해지는 주님의 말씀은 영혼을 변화시키고 세상을 변화시켰습니다. 이것이 역사의 증거입니다. 역사의 교훈을 통해볼때 진리는 살아움직이는 생명이고 진리는 전해지기만 하면 됩니다. 어떻게든 전해지기만 하면, 땅끝까지 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 수많은 이들의 헌신과 희생이 있었습니다. 전하는 것이 얼마나 큰 사랑입니까. 자신의 삶을 떼어 내어주는 것과 같습니다. 전하는 자의 능력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진리는 전해지기만 하면 됩니다. 전해지기만 하면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다른 한편으로의 역사의 교훈은 복음을 가진 이들이 정말 말씀대로 잘 사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이고, 진리의 메세지에 물이 타지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이리저리 제단하지 않고, 보고 싶은 것만 보지 않는 것이 너무 중요합니다. 세상을 혼란케하는 많은 운동과 사상들이 알고보면 말씀을 가진 이들이 진정 말씀대로 살지 않음으로, 복음은 한계가 없는 것이고 완전한 치유인데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 바라보는 이들이 한계를 보더라는 겁니다. 저건 아닌데 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자리가 너무나 중요합니다. 진리는 진리입니다. 무엇으로도 대체할수 없고 가릴수도 없습니다. 저들이 바라는 것은 바로 이 진리입니다. 이 진리가 전해져야 세상이 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자리를 잘 알고 복음을 가진 우리가 얼마나 중요한가 돌아보는 오늘이 되길 원합니다. 

늘 우리에게 푯대가 되어주는 바울사도, 그가 위대한 역사를 쓸수 있었던 것은 그는 정직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고통은 고통이고 어려움은 어려움입니다. 나의 연약함은 연약함입니다. 애써 포장하고 아니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힘들면 힘든 것입니다. 아프면 아픈겁니다. 우린 나의 정직한 모습을 가리는데 너무 익숙합니다. 세상에서는 정직하기가 참 힘듭니다. 자존심같은게 그런거죠. 애써 강한척해야 합니다. 문제없는 척 해야합니다. 잘 이겨낼수 있는 척 해야합니다. 착하고 선한척 해야합니다. 그리고 너무 신기한건 척척척에 나 자신도 속더라는 겁니다. 정말 강하다고 착각합니다. 내가 결심한거는 어떻게든 지킬수 있다고 오해합니다. 문제없다고 오해합니다. 그래도 착하다고 선하다고 오해합니다. 바울은 정직했습니다. 그리스도교는 정직한 종교입니다. 정직의 전제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이 다 아신다는 겁니다. 내 마음 깊은 곳까지. 절대 남에게 보여주지 않은 그 깊은 것까지 다 이미 아십니다. 그러니 가릴 필요가 없습니다. 척할 이유가 없습니다. 오히려 이것이 많은 문제를 야기한다는 것을 우린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바울안에 약함이 있었습니다. 고린도에 전도를 하러갔는데 고린도의 큰 위용과 화려함앞에 심히 두렵고 떨었다고 했습니다. 이건 분명 약함입니다. 아니 하나님의 사도가 말이야, 하나님의 자녀가 뭘 두려워하고 그래. 저들은 우리의 밥이다하고 힘차게 전진해야지. 아니 말씀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뭐 떨고 그래. 남자가 말이야. 그런데 바울은 심히 두렵고 떨었다고. 여러분 어느 한도시에 개척을 나간다고 합시다. 힘차게 전진하지만 이런 세계가 있지 않습니까. 바울이 정말 정직하잖아요. 

예) 파송

오늘 본문에서 바울사도안에 또다른 약함을 고백합니다. 육체의 가시가 있다. 가시로 찌르는 듯한 큰 고통이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몸이 참 약했습니다. 그래서 의사 누가가 그의 동역자가 되었어야 했는지도 모릅니다. 이 육체의 가시가 무엇일까. 여러 많은 해설을 할수 있겠지만 단순하게 본다면 육체의 고통이 있는 것입니다. 몸이 아프다는 것입니다. 가시로 찌르듯이. 여러분 생각해봅시다. 이 고백은 정말 대단한 용기입니다. 고린도교우들은 자신을 하늘처럼 여기고 있는 제자들입니다. 그들에게 바울은 그야말로 천사보다 더 거룩해보였을 것이고 존경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지금 그들에게 내가 지금 아파서 괴롭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늘의 사도가 아프다고 할때 어린 성도들은 시험들수 있는 사람도 있지 않겠습니까. 항상 거룩해야 하고 항상 조금도 흠이 없어야 하고 조금도 거침이 없어야 하고 사도를 향해 이런 그림을 그리고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아프다는 겁니다. 뭐지 하나님의 저주인가. 자기도 구원을 못하는 사람이 누굴 구원한단 말인가. 이런 생각하는 자들도 있지 않았겠습니까. 여러분 우리의 강함은 이런것이 아닙니다. 강한척하느게 아닙니다. 아무 문제없는 척 다 이길수 있는 척 하는게 아닙니다. 우리의 진정한 강함은 정직한 것입니다. 아프면 아프다고 하는겁니다. 그 어떤 것도 가리지 않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영혼의 자유함 아닙니까. 내가 이런 말을 했을때 저 사람이 이렇게 판단할까봐 가리고 숨기고 혼자 끙끙대고. 바울은 정직하게 고백합니다. 로마서7장에 오호라 난 곤고한 사람이로다. 정직하게 탄식합니다. 죄가 날 사로잡는도다. 자신의 약함을 다 드러내서 얘기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더 나아가서 세번 주께 기도했다고 얘기합니다. 이건 더 큰 약함입니다. 왜냐, 아니 사도가 아파도 난 참고 간다. 이정도의 아픔쯤은 위대한 사역을 위해 난 이기며 간다, 죽으면 죽으리라 이런 결단과 각오로 가야하는거 아닌가. 그런데 사도는 세번 기도했다고. 제발 아프지 않게 해주세요. 제발 이 약함이 떠나게 해주세요. 여러분 이 사도의 모습이 얼마나 주님앞에 철저히 작아진 모습입니까. 자신의 약함, 자신의 부족함, 자신의 어려움을 그대로 주님앞에 가지고가서 가절히 기도하는 이 사도의 모습. 이 모습이 크리스천입니다. 

그런데 더 감동적인 것은 무엇입니까. 사도가 자신의 약함을 지금 드러내고 고백할수 있는 이유는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가 약함을 자랑한다고 해서 막 약함을 소문내고 떠벌리고 다니자 이런거 아니잖아요. 먼저는 우리가 주님앞에 정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 내가 이런 고통이 있고요, 내가 이런 약함이 있습니다. 그리고 제발 도와주세요. 제가 더 잘하고 싶고 더 많은 일을 하고 싶으니 이 약함이 떠나게 해주세요. 자 그런데 우리가 더 봐야할 것은 주님께서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으셨다는 겁니다. 뭐라고 말씀하시나. 

고후12:9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이 말씀을 쉽게 얘기하면 '내가 너에게 준 은혜가 충분하니 더 줄 은혜가 없다' 충격적인 응답아닙니까. 이미 충분히 줬으니 더 줄 은혜가 없다. 이 응답을 여러분이 받았다고 합시다. 여러분 반응이 어땠을까요. 날 더이상 사랑안하시나봐요. 내가 이렇게 고생했는데 이 기도하나 안들어주시다니. 주님을 원망하고 판단하고 힘빠져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바울이 뭐라고 고백합니까.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아 맞지. 무릎을 탁 치면서 아 맞습니다 맞습니다. 주님 옳습니다. 이미 나에게 주신 은혜가 있습니다. 조금도 부족함 없이 차고 넘치게 솟아나는 그 은혜가 있습니다. 나를 살리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나를 사도삼으신 이 위대한 사랑과 섬김, 그리고 십자가안에 담긴 영원한 사랑의 약속, 지금껏 나를 돌보시고 인내하시고 가장 낮은 곳에서 나를 섬겨오신 주님의 사랑. 족하고 족하다. 조금도 부족함이 없나이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여러분 우리에겐 이미 넘치는 은혜가 있는 것이 아닙니까. 나의 나 된 것은 오로지 주의 은혜라. 나의 공로가 하나도 없도다. 죄인된 나를 사도 삼으시고 놀라운 축복의 영원한 영광의 자리를 나에게 주신 그 사랑 말입니다. 주님의 응답은 너무도 마땅한 응답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고후12:9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나의 약함이 하나님의 능력의 접촉점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참 많은 오해를 하고 살아갑니다. 나를 슈퍼맨이나 아이언맨으로 만들어주시면 참 좋을텐데. 너무나 작고 연약한 질그릇이라는 거에요. 우리에게 몸이 있잖아요. 육체가 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약합니까. 밥 안주면 즉각 괴롭힙니다. 조금만 관리안해주면 아프다고 난리입니다. 육의 여러 소욕들이 우리를 얼마나 약하게 만듭니까. 육이 소욕앞에 거룩함이 사라질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우리의 연약함 다 아시잖아요. 이 연약함이 유혹에 넘어가고 이 연약함으로 엎어지고 사단의 종으로 살게되는 접촉점이 될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얼마나 많은 이들이 그렇게 살아갑니까. 하나님의 사람이 되면 육체의 약함 다 사라지고 슈퍼맨이 되면 좋겠는데. 

그런데 반전이 있더라는 거에요. 이 약함이 주님을 요청한다는 거에요. 주님의 능력을 간구한다는 겁니다. 죄의 도구가 되었던 이 약함이 이제는 주님 안에서 주님의 능력이 들어오는 통로가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겐 여러 많은 모양의 약함이 있습니다. 단순 육체의 약함 뿐이 아닙니다. 믿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하고 낮아지지 못하는 여러 많은 약함들. 참 약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걸 숨기는 자들이 아닙니다. 왜 숨기지 않습니까. 왜 바울은 자랑하기까지 합니까. 이 약함을 통해 주님의 능력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론은 주님의 능력으로 승리하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가 약함에게 항상 집니까. 약함을 가립니까. 왜 약함으로 실패했다고 말합니까. 약함을 약함으로만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바울이 우리에게 주신 놀라운 교훈은 나도 그렇게 약했다, 그런데 약함이 능력이더라. 아 나의 이거 약함이 문제야, 이거 해결되면 정말 잘 할수 있을텐데. 아니다아니다. 그 약함이 능력이다. 그 약함을 통해 주님의 능력이 드러나는 것이다. 이런 나인데 주님이 역사하셨다는 거에요. 나의 능력을 통해서가 아니라 주님의 능력으로. 주님의 능력으로 행했음이 결국 이 약함을 통해 증거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앞에서 베드로는 자신의 결의와 자신의 강함으로 결국 무너졌지만, 주님은 겟세마네 아버지여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이것만 보면 얼마나 약한 모습입니까. 베드로가 더 강해보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 약함이 진정한 강함이다. 이것이 주님의 능력의 통로입니다. 약함을 시인하고 약함을 붙들고 주께 나아갈때 주께서 힘을 주시고 그 힘이 진짜 하늘의 능력입니다. 이 능력을 힘입어 사는 자들이 그리스도의 사람들입니다. 약함 또한 무기가 되면 사단이 더이상 손쓸수 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자신을 의뢰하지 않고 또한 자신의 강함을 의뢰하지 않고 한없이 약함속에 좌절하지 않고 약함에 무너지지 않고 약함을 시인하고 약함을 붙들고 간절히 기도하는 이를 통해 주님은 능력을 나타내실 것입니다.